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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May 12. 2023

39. 일기떨기

여전히 읽은 책보다 아는 척하는 책만 많은 서른이 되었다.

예술인아파트에 사는 미카


고교생 백일장을 빼놓고 나의 십대를 말할 수 있을까. 요즘처럼 낮에는 덥다가도 해가 지면 오들오들 떨어야만 하는 5월이면 학교에 붙어 있을 때보다 전국 고교생 백일장을 다니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어제는 천안, 오늘은 목포. 문예창작과가 있는 대학에서 주최하는 백일장부터 크고 작은 시, 도 단위 글짓기 대회까지. 입시철이 되기 전부터 대학에 도움이 되는 수상과 그다지 소용은 없지만 자기소개서 한 줄은 더 채울 수 있는 짤막한 기록들까지. 학급 내에서 눈에 띄는 수상 경력이 없던 나 역시 매년 5월이면 이제는 뭐라도 해낼 때가 되었다며 기합을 넣곤 했다. 그런 호기로움도 안양으로 돌아오는 불 꺼진 단체 버스 안에서 금세 쪼그라들곤 했지만. 몇몇 백일장은 나처럼 맥 빠질 게 분명한 학생들을 배려하기 위해 예선을 치르곤 했는데 나는 그런 백일장들. 교보문고에서 주최하는 대산 백일장이나 OO 대학교 백일장 같은 일종의 심사가 필요한 곳에는 번번이 가보지도 못하고 고배를 마시기 일쑤였다.


딱 한 곳, 시인 고정희의 생가가 있는 해남에서 열리는 백일장. 고정희 백일장은 내가 유일하게 예선을 치르고 참가한 백일장이었다. 정작 사찰에서 하는 백일장에 가서는 절 밥이 내 입맛에 맞는다며, 내 길은 시가 아닌 종교가 아닐까, 하고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힌 채 늘 그랬듯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그렇게 살면서 해남을 얘기할 때면, 너무 멀어서 땅끝 마을이라는 칭호가 꼭 붙는 그곳을 말할 때면 나는 고정희 백일장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그 시인에 대해 뭘 아는 건 아니었고, 그저 시골에서 글 깨나 쓰는 시인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정희,라는 이름. 여러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다가도 결국엔 아련해지는 이름의 익숙함 탓에 이름만 들어본 시인 중 한 명으로 남은 시인 고정희. 그러다 회사에서 번역서 추천을 위한 여러 저자의 소개 글을 작성하던 중, 고정희 시인의 이름을 다시 마주했다. 어디서 태어난 지는 알고 있었고, 누구의 추천을 받아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뭐 그런 것들. 그러다 수상 내역이나 특별 활동이 있는지 검색하던 중. 시인이 지리산에서 실족사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의 본명이 고정애이고 5남 3녀 중 장녀라는 것. 그리고 해남에서 태어나 경기도 안산, 예술인 아파트에서 살다 죽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살다가 아주 잠깐 신호 건너편 아파트에서 몇 년 살다가 다시 돌아온 곳. 오롯이 10대와 20대를 보내고 30대를 맞이한 예술인 아파트. 이름에 걸맞게 나라에서 예술가들을 위해 지었고 몇몇 예술가들이 살기도 했고, 산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으나 내가 우연히 가닿았다가 다시 멀어졌다가 다시 일로 읽게 된 시인 역시 이곳에서 터를 잡고 지냈다는 게 이상했다. 기이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멀리 짐작하는 것 같고, 말 그대로 이상했다. 실은 이상한 일은 이것 말고도 너무도 많다. 수학과 과학 영어까지 못했던 중학생이 우연히 글을 쓰는 학교에 가고, 거기서도 글은 안 쓰고 놀다가 또 대학에 가고, 거기서도 글은 안 쓰고 딴짓을 하다가 출판사에 다닌다. 글이 먹고사는 일에 도움이 될까, 궁리했던 나는 이제는 글이야말로 ‘사람답게 사는’ 일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여전히 읽은 책보다 아는 척하는 책만 많은 서른이 되었다. 시집과 기사를 번갈아보며 ‘고정희’라는 이름을 들여다보다가 지금 여기 있는 건 내가 꼭 읽어야 하는 게 이곳에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 주제

 고등학교 때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지금과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 하는 일이 꼭 운명처럼 느껴진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요가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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