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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May 26. 2023

40. 일기떨기

그리고 다시 또 서로에게 건넬 편지를 쓸 것이다.




며칠 전에는 아주 오랜만에 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그동안 받은 편지나 카드들은 노트북 케이스 같은 큰 파우치에 보관해두는데, 유일하게 보기 좋은 곳에 꺼내둔 것이 하나 있다. 영화 팸플릿 사이즈 정도되는 그 편지지는 앞 쪽에 L.O.V.E, LOVE가 큼지막하게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어서, 평소엔 내 책상 한켠에서 오래된 포스터처럼 걸려 있다.

그 편지는 작업도 안 되고, 글 한 줄도 읽고 싶지 않은 날. 그렇다고 책상을 완전히 떠날 수는 없고 일단은 뭐가 떠오를 때까지 붙잡힌 듯 앉아 있어야만 하는 순간엔 잠깐 내 곁에 머물다 가는 조용한 친구가 되어주는, 아주 기특한 역할도 한다. 

나는 그 편지를 보낸 친구, J에게 편지를 썼다. J는 무슨무슨 기념일이 아니라도 일상처럼 편지를 건네는 친구인데, 그 티키타카가 한동안 뜸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아주 오랜만에 J가 준 편지를 읽으면서 연재 중인 긴 소설을 마무리할 수 있었으므로, J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살면서 소설을 쓰게 될 줄 몰랐던 것보다도, 그 소설에 식물이 마치 주인공의 그림자처럼 등장하는 소설을 쓰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는데- 문득 펼친 오래된 편지 속에는, 나를 부지런히 자라나는 식물처럼 기특하다고 말해주는 J의 다정한 목소리가 있었다. 별 거 아닌 우연이, 작은 연결이 신기하던 찰나, 다가올 J와의 만남에는 꼭 편지를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편지와 같이 건네면 좋을 법한 책도 발견해서 J와 약속한 날을 기다리는 시간이 즐거웠다.

내가 가끔 읽는 오래된 편지에서 J는 우울과 불안이 자기를 맴돌다 알아서 날아가도록 내버려두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작고 귀여운 것을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자신보다 한참 더 큰 내가 흔들리는 순간에 기꺼이 힘이 되어주겠다고 했다. 

이 편지를 받은 날로부터 5년 정도가 흐른 지금. J는 과거 스스로에게 바랐던 것들을 모두 노력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여전히 나를 아끼는 마음도 물론. 

겁도 많고 호기심도 많은, 그래서 늘 조심하며 세상을 걷지만 자기만의 모양과 속도대로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는 내 친구, J.

편지를 쓰면서, 예전과 달리 뭔가를 한창 지나가고 있는 중의 이야기보다, 다 지나고 난 뒤의 이야기를 더 자주 듣게 되는 삼십대가 된 것 같아 잠깐 쓸쓸했다. 우리 서로의 자초지종을 너무 늦지 않게 나누는 거리에 있자고 다짐하듯 약속했지만, 그럼에도 놓치고 말 어떤 순간을 위해서, 보험처럼 작은 책을 함께 건넸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는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이 모여 있는 특별한 사전이다. (예컨대 이런 말들, ‘발다인잠카이트’라는 독일어는 ’숲 속에 혼자 남겨진 기분. 편안한 고독감, 그리고 자연과 맞닿은 느낌’을 담고 있는 단어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느끼지 못하는 거대한 기분을 한 단어가 품고 있다.)

그리하여 어느날의 J에게 나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마음들이 쌓여갈 때. 한장 한장 거듭 읽다 보면 혼자만 갖고 있던, 혹은 혼자서만 간직할 수밖에 없던 마음들이 알아서 풀어지는 순간이 찾아오기를 바라면서. 그런 엄청난 일을 나는 이 작고 귀여운 책이 해낼 것 같았다.

편지 마지막 줄에 “늘 네 평안과 행복을 바라는 내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말고!”라고 썼다. 나는 편지를 쓸 때 마무리 인사를 하는 순간을 가장 좋아한다. 편지 쓰기가 끝나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평소에 생각하지 않은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날 나는 ‘늘 J의 평안과 행복을 바라는 나’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새삼 아주 선명하게 확인했다. 평소에는 여러 ‘나’들에 가려져 도드라지지 않았을 텐데. 역시 편지를 쓰길 잘했다.

*

이 편지를 건넨 지 일주일이 지나서 다시 또 J와 만날 일이 있었다. 설마 했는데, J는 답장을 준비해왔다. 아주 귀여운 키링 두 개와 함께. 편지 속에서 J는 이번에도 새로 키우고 있는 식물 하나를 나로 빗대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보면 식물을 보듯 ’아, 그래. 내 삶에 얘가 있었지‘라는 기분이 든다고. 그래서 다음 만남에 우리는 각자 새 반려식물을 함께 들이기로 했다. 아마 미래의 우리는 그 식물들을 무심히, 때로는 극진히 돌보면서 생각하겠지. ’그래, 내 삶엔 얘가 있었지.‘ 그리고 다시 또 서로에게 건넬 편지를 쓸 것이다.




대화 주제     

■ 최근에 편지를 건네거나 받은 적이 있나요? 

■ 혜은처럼 거듭해서 다시 읽게 되는 편지가 있나요?

■ 이 친구는 제게 ‘십년 일기장 쓰기’ 20주년이 되면 일기들에 응답하는 책을 써보라고 했어요. 그러고 보니 일기는 자기 자신에게 부치는 편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편지의 발신인을 선택할 수 있다면, 누구에게 편지를 받아보고 싶은가요?

■ 집이나 회사에 직접 돌보고 있는 식물이 있나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을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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