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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Jun 16. 2023

41. 일기떨기

그들과 나눈 한 줌의 행복, 사랑, 희망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안다.

보름 넘게 발리를 다녀왔다. 내가 머문 곳은 일명 ‘짱구’라는 지역인데, 흔히 발리하면 바로 떠올리는 유명한 지역은 아니라고 했다. 이제 막 개발되고 있는, 거리 몇 곳만 개발된 작은 동네였다. 워크 스페이스가 있는 곳이어서 일을 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발리에는 일을 하러 갔다. 일하려고 발리까지 가느냐고 하겠지만 요즘 삶의 방식이 이렇다. 어디를 가든 일을 한다. 프리랜서 작가라는 큰 장점이자 단점인 셈이다. 물론 나는 장점이라 생각한다. 낯선 환경에서 일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좋은 자극이다. 특히나 언어까지 다른 해외라면, 일하는 동안 보호 본능이 작동되어 일이 잘 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 위해 내가 하던 일들에 몰두하며 나를 찾게 된다는 거다. 약간 그런 기분이라는 말이다.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 그렇게 나를 집중하는 것. 여행의 묘미는 그런 게 아닐까.

발리에서는 대부분의 시간 일을 했고 쉴 때는 워크 스페이스 옥상에 올라가 멍을 때리거나 바다를 걸었다. 잘 살고 있느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졌다. 성취나 성과 말고, 해내가고 있는 일 말고, 내가 놓친 것들에 대한 질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무언가를 놓치고 살고 있다.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의 형태를 약간 잃었던 것 같다.

불확실한 미래에서 구체적인 나를 그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열심히 만들었더니 예상치 못한 파도가 모든 것을 무너트릴 수도 있다. 열심히 짓고 났더니 정작 나는 오를 수 없는 높이의 성벽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무너지지 않을, 확실한 미래를 짓는 방법이 있을까. 내가 서 있는 해변조차 발가락 틈으로 빠져나가는데, 그게 가능하기는 한가. 하지만 그런 방법이 없다고 해서 어떤 미래도 꿈꾸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 이 해변에 있게 될 텐데. 바다를 건너고 싶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가 아니구나, 내가 만들 수 있는 배는 어떤 배인지부터 생각해야 하구나. 

그곳에 있는 동안 열심히 내 안에 있는 부품들을 꺼내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나의 작은 배를 만들었다. 현실적인 금전으로 뼈대를 만들고, 무엇을 추진력으로 나아가게 할지, 배 겉모양은 어떻게 할지. 아무튼 그런 생각을 했다. 진작 했어야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가 해치우듯이. 

배의 도면을 완성해서인지 발리에 다녀온 이후 조급함이 꽤 사라졌다. 요즘에는 나룻배에 탄 것처럼 마음이 여유롭다. 언제까지 이 상태일지는 모르겠지만, 즐기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 내 도면을 함께 살펴보며 어느 부분을 보강해야 하는지, 이 배의 완성이 어떨지 함께 머리 맞대고 궁금해하는 동료들이 있음을 깨달은 시간이었다. 최근 읽은 예스24 봉태규 배우님 인터뷰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나와 같이 성장해 온 친구들이, 함께 울고 웃으며 일하는 동료들이 그리고 내 삶의 원동력인 가족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그들과 나눈 한 줌의 행복, 사랑, 희망이 다양한 형태로 내 안에서 뿌리내리고 있음을 안다. 각자의 온기를 유지하려면 서로가 필요하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고, 나는 외롭지 않다.”

요즘 이 말을 매일 읽는다.


대화 주제 


■ 발리 라이프에 대한 수다를 떨겠어요. 그 전에, 저 없는 동안 다들 어떤 일이 있으셨나요?

■ 거짓말처럼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최근 운동에 빠진 이유도 이 여유때문인 것 같아요. 아니면 운동을 해서 여유가 생겼거나. 체력의 여유가 마음의 여유 같기도 해요. 그런 의미로 다들 사이렌 보시나요?... 

■ 또 뜬금없는데 여유가 생겨서 ‘디지몬 어드벤쳐’를 정주행 중이에요. 보다 보니 ‘아 이게 나의 근본이구나’ 싶어요. 나의 근본이 된 유년시절 만화, 뭔가요? (참가로 전 포켓몬을 너무 싫어했어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2. 선란

『무너진 다리』 『어떤 물질의 사랑』『천 개의 파랑』『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나인』『노랜드』『이끼숲』를 썼습니다.

  환경파괴, 동물멸종, 바이러스를 중심으로 SF소설을 씁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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