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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Jan 08. 2024

50. 일기떨기

사람은 잘 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고정된 존재는 아니니까.




홍콩에서 보낸 2023년 12월 30일, 그리고 31일     


복도 테라스에 기대 맥주를 마시면 루프탑 바가 부럽지 않겠다 싶은 차이완 역 youth square 호텔에서 14층에서 은하와 재회했다. 첫 끼로는 어째서인지 근처 베트남 음식점에서 토마토 해산물 라면을 먹었고, 사실 밥보다는 맥주를 빨리 마시고 싶었는데 하필 이 식당은 어떤 주류도 팔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랍도록 아쉬웠지만 잘못된 선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고 그저 다음 맥주를 향한 기대를 더 키워갈 따름이었다.     

은하의 비행기는 연착됐고 나는 계속 목과 어깨가 찌릿찌릿했다. 그래도 마치 크리스마스부터 숙면하고 만난 사람들처럼 텐션이 좋았다. 약간의 습도 섞인 미온의 바람이 부는 홍콩의 밤을 은하와 산책하면서 각자의 비행 에피소드를 나눴다. 은하가 잠깐 눈을 붙이고 났을 땐, 옆자리의 중년 여성이 수첩에 메모를 하는가 싶더니 잠시 후엔 휴대폰으로 긴 텍스트를 읽고 있었다면서 ‘완전 미래의 윤혜은이잖아!’ 라고 했다.     

어차피 이렇게 한량처럼 이름 모를 동네를 산책할 거라면 내일도 그냥 아무 버스나 타고 아무 데나 내려서 하루를 허비해도 괜찮지 않을까 은하가 제안했고 그러기로 했다. 세븐일레븐에서 산 맥주와 칼스버그 리미티드 에디션 맥주는 그냥 그랬고 은하가 한국에는 팔지 않으니 두 봉지를 사야 한다고 호들갑을 떤 레이즈 트러플 감자칩은 물론 맛있었지만 이튿날 소진이 내 사진을 보고 생각 났다며 마트에서 사먹은 인증샷으로 조금 시시해졌고… 대신 마트에서 산 정물화 같은 사과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아침에 다시 만난 호텔은 올해 초 혼자 묵은 브루클린 호텔의 스퀘어 구조와 닮아 있었다. 중앙에 작은 사각형 모양으로, 잔디가 깔린 테라스에서 간단한 조식을 먹었다. 호텔 커피머신으로 마신 카푸치노가 어쩐지 남은 여행 중 마시게 될 커피들 중 가장 맛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또 사로잡히고… 홀로 아침 산책을 가려던 나를 붙잡아 조식을 먹자고 제안한 은하 덕분에 이곳이 홍콩인 것도, 지금 계절이 겨울인 것도, 내일이면 2024년이 되는 것도 잊고, 그냥 동네 카페에서 나눌 법한 대화를 하면서… 평소에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도 미처 공유되지 못한 가장 작은 단위의 일상, 혹은 가장 큰 단위의 마음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는 게 좋았다. 홍콩에 있지만 홍콩이 멀리 있다는 점이.     

함께 쓴 아침은 좋았지만, 홀로 산책을 나갔다. 전날 밤 묘한 느낌으로 반짝이던 산으로 향하는 언덕은 걸음마다 국화를 파는 집이 있었다. 알고 보니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기리는 공동묘지였고, 본가가 어느 시인의 묘지 바로 아래에 있는 나로서는 어떤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사방이 한적한 가운데 종종 산으로 향하는 택시와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틈으로 산책하듯 걷는 이 순간이 아직은 가장 관광보단, 여행에 가까운 덕 같았다.     

간밤에 한 약속대로 아무 버스를 잡아 타러 가는 길, 겨울을 좋아하지만 따뜻한 날씨는 풍경을 사랑스럽게 만든다. 은하는 오늘이 둘째 날이니 두 번째로 지나가는 버스를 타자고 했다. 우리동네에도 있는 82번 버스를 타고 타이청 거리에서 내렸다. 로컬 스타일의 점심을 먹고, 뉴진스 광고가 지나가는 트램을 찍고, 중심 도시로 갔다. 비눗방울과 홍콩, 중국 국기가 서로 다른 높이에서 나부끼는 관광지를 거닐면서 올해 마지막 반나절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고민하는 순간이 사치스러웠다. 여러모로 사치를 하려고 온 것이지만.     

스타페리 선착장의 하버프론트 산책로를 가볍게 둘러볼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다국적 생명보험 기업이 한시적으로 조성한 미니 놀이공원에 (AIA가 홍콩기업인 것을 이제 앎) 홀려 밤의 카니발을 예고했고... 홍콩 아트 뮤지엄에서 무료 전시를 보는 순간이 가장 쾌적하고 평온한 순간이었다. 구글맵이 일러준 ‘평소보다 덜 혼잡함’의 평소는 모르지만 미술관과 바로 건너편에 샤넬 장식을 두른 페닌슐라 호텔 일대의 보도블럭을 모두 메운 인파를 생각하면 미술관 내부는… 조조영화관 수준이긴 했다.     

이후 중앙역에서 지하철이 아닌 버스를 타는 바람에 8분 거리를 40분에 걸쳐 도착한 미도카페는 브레이크 타임이었고, 50분 정도 기다리는 것은 별 일이 아니나 오늘이 31일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서 이러다가는 아침의 셀프 차찬탱과 이름 모를 점심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새해를 맞이할 것 같아서… 급한대로 파이브 가이즈에서 31일의 마지막 식사를 하게 된다. 전혀 조급하지 않게 다니다가 문득 급한대로 대수롭지 않은 것들을 향해 돌진하는 리듬으로 짐행되는 여행이랄까.

해가 지고, 농담처럼 예고했던 놀이공원에서 몽땅 올인한 2023년 마지막 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충전한 돈으로 맥주를 마시고, 놀이기구를 타려고 충전한 토큰으로는 인형놀이에 탕진했다. 2판 2승의 공 던지기, 5판 2승의 사격으로 인형왕이 되었다. 한국 시간으로 2023년을 십 몇 분 남겨두고 공 게임, 총 게임을 하며 보낼 줄 몰랐다. 뭔가 아쉬운 실력을 의외의 집념과 부유하는 운으로 매듭지은 2023년. 지난 한 해도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거머쥔 것들이 참 소중했고, 덕분에 오래 행복할 수 있었다. 2024년도 비슷한 듯 다르겠지. 사람은 잘 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고정된 존재는 아니니까.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을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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