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용한 오후와 같이 졸다가
한 잔의 물을 마신다.
그것은 꽃무늬 예쁜 꽃찻잔
나는 조용한 꽃이 되었다.
오후에만 핀다는.
고 최인호 작가의 어느 책에 나온 시다. 소년시절 읽은 그의 책이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검색도 되지 않으나 여태 잊은 적 없는 시다. 최인호는 이 시를 읽었던 당시의 나와 같은 청소년 무렵 썼다고 했다.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곡을 붙여 소풍날 친구들 앞에서 부르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강은교의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이라는 시도 좋아했다. 라디오 심야프로그램에서 낭창한 낭송으로 들었는데, 어쩌다 시 낭송을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나도 이 시를 암송했다. 애틋한 느낌이 있어 그런지 듣는 이들이 좋아했다. 외기 쉽다는 이유가 먼저였지만.
친구들은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몰래 도시락을 까먹을 궁리를 하거나 학교 앞 분식센터에서 무슨 색깔 좋아하세요?, 짜장면 먹으면 국물 남아요 안남아요? 하며 여학생들과 미팅할 계획 따위에 관심이 있을 때 나는 소설이나 시집을 끼고 다녔다. 전학생이라 아이들 사이에 겉돌기도 했지만 학교 옥상에 올라가 굴뚝에 기대어 조용히 책을 읽는 게 좋았다. 운동장 저쪽 등나무 아래 벤치에서 읽으면 그럴듯 했겠으나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너무 문학적이기에.
시커먼 문디 머스마들인 친구들에게 문학소년 따위의 소리를 듣는 건 별난 놈, 잘난 척, 계집애 같은, 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거 빤하다. 그래도 허세작렬 십 대라 한 번은 어떤 애가 시집을 읽고 있기에 나는 김춘수의
<시론>을 들고 다녔다. 읽은 게 아니고. 한문이 반인 책이라 옥편을 찾아가며 읽었는데 너무 어려워 그저 들고만 다녔다.
전학 온 첫날 하필 교내 백일장이 있어 글을 냈는데 그만 일등을 해버렸던 적이 있다. 담당 선생님이 부르더니 못 보던 놈인데 전학 왔냐? 글 좋더라, 평소 글 좀쓰니? 묻기에, 아뇨! 했다. 그럼 일기는 쓰냐? 해서 또 아뇨! 했다. 선생님은 잠시 당황하시다, 그럼 연애편지는 쓰냐? 묻기에 또 아뇨!
부끄러움도 있었지만 사실 혜성처럼 나타난 신비스러운 아이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만화책에 그런 주인공이 종종 나오는데 멋지지 않은가! 그러자 포기했는지 더는 묻지 않고, 글은 좋은데 원고지 쓰기는 엉망이더라 했다. 대입 과목이 아닌데 원고지 쓰기를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는 게 당시 스파르타 남자 고등학교의 분위기였으므로 그럴 수밖에. 그저 읽다가 쉬고 싶은 부분에 쉼표를 찍고, 내 호흡대로 띄어쓰기를 했었다.
그래도 그 일로 전학생인 내 존재가 학교에 알려지는 데는 도움이 됐다. 아닌 척과 그런 척의 반반 사이에서 어쨌든 나는 친구들 사이에 글 좀 쓰는 놈이 됐다. 친구들이 학생잡지마다 있던 펜팔란에서 맘에 드는 주소를 골라오면 그럴듯한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고 보름달 빵과 술을 얻어먹었다. 아직 미성년자이므로 술은 금지되어 있지만 그런다고 고3짜리 사내 녀석이 술을 금지하고 있다면 그 애는 커서도 미성년자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더구나 나는 '문학소년'이 아닌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라디오 심야프로그램마다 박인희가 그렇게도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이야기하자고 했건만, 군것질이나 여학생에만 관심이 있는 친구들과 어떻게 그처럼 고상한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 그러니 버지니아 울프가 누군지 알 기회가 없었다. 다만 울프, 즉 늑대라는 이름을 가진 작가이니 어딘가 보이쉬한 멋진 여류작가이겠거니 했다. 지금도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거나, 다리 쫙 벌리고 텅텅 거리는 하레이를 타는 여자에 끌리는 건 '떡잎' 때부터였던 것 같다.
문학소년이 되는 계기는 다양하다. 누구는 여학교 문예반 시화전에 예쁜 애가 있어서, 누구는 늦은 밤 연애편지를 쓰다가, 그리고 나는 누나들이 남긴 책 때문이었다. '거기 산이 있어 올랐던' 것 처럼 심심한데 마침 거기 책이 있어 읽었다. 누나들이 남긴 다락방의 책들은 아직 어린 내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노상 집 나가는 여자 노라가 나오던 소설, '뮌헨의 잿빛하늘' 같은 우울한 얘기만 써놓은 전혜린의 수필, 처음부터 지루하게 장화 벗는 얘기만 나오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것이었다. 그나마 <채털레이부인의 사랑>은 1분 20초마다 정염이 끓어오른다는 사춘기 소년에게는 흥미진진한 명작이었다. <북회귀선>과 함께 야한 것의 예술성을 깨달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행히 영향이 크지는 않아 묘한 웹소설작가가 되지 않은 건 천만 다행이다.
기억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초등 2년 무렵. 무슨 일로 임시로 온 선생님이 사물함에 둔 내 글을 보셨다며, "정호는 커서 소설가가 되겠다" 했던 그 한마디. 그 한마디가 비록 소설가는 되지 못했지만 평생 글쓰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나 지향을 잃지 않게 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때 그 선생님이 담임이어서 곁에서 좀 더 이끌어주셨다면 나는 소설가가 됐을 거야, 라고 말할 때가 있다. 그러면 듣는 이마다 안타깝게 여긴다. 내 게으름이나 부족한 솜씨 탓이 아니게 되는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내 글은 내가 가장 잘 안다.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은 속이지 못한다.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솔직함의 문제라는 것을.
선생님이 칭찬했던 글을 기억한다. 만화책과 반공교육의 영향을 버무린 비빔밥. 내가 동네 아이들과 낯선 사람을 간첩으로 의심해 추적하는 이야기. 그래서 간첩신고 보상금을 받을뻔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반공 글짓기의 모범적인 끝맺음인 '나는 반공 정신으로 북괴를 때려잡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라고 썼다. '결심했다'가 꼭 들어가야 했다. 산불조심이든 쥐 잡기든 관련 글의 마무리는 그래야만 했다. 심사를 하는 사람은 교사이며 교사는 아이들이 '결심'을 하도록 교육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고교 때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던 글도 다르지 않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의 마음에 들까 갖은 얄팍한 수를 다 부린 글이었다. 주어진 제목조차 너무나 빤한 '고향'. 이미 제목에서부터 그리 정한 담당 선생님을 만만히 보고 원고지를 채우기 시작했다.
'나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할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도입이다. 잔뜩 멋 부린 티가 나는 첫 문장이지만 일단 선생님의 눈길을 끌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뭐지? 할 테니.
'우리가 탄 장의차가 고향에 들어서자 마을 입구에 커다란 고목이 너른 팔을 벌려 우리를 맞았다...'
'어른들이 "어허 달구!" 하며 할머니를 매장하는 동안 나는 산 아래 개울가에 앉아 둥근 조약돌을 주워 하릴없이 흐르는 물에 던졌다...'
'어느덧 날은 저물어가고 떠나는 장의차 뒤로 고목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이렇게 썼던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왜냐하면 심상에 따라 자연스럽게 쓴 글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그럴듯한 표현과 복선을 깔아 눈에 들까 하는 계획적인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상을 받았다.
그렇게 받은 상 때문에 이후 글 쓰기가 자신이 없어졌다. 기술이야 훈련으로 가능하지만 자신을 속이는 글을 쓰는 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함보다 거짓을 보태고 감정을 과장하는 수를 써야 상을 받는다면, 그리고 그런 글로 잘 쓴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과연 쓰는 즐거움은 무엇일까?
요즘 넘치는 글쓰기, 책 내기 강의 같은 것을 보면서 그것이 단지 글 쓰는 기술만으로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단 한 줄을 쓰더라도 내가 나를 속이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러나 어렵다. 쓰다보면 어느새 기술을 동원하고 있다. 솔직해지는 것이 두려워 여태 망설인다. 더욱이 책은 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게 살아온 삶으로 쓰는 것이라 믿기에 나는 아직 문학소년에서 그저 나이만 더한 문학노년에 머물있다. 언제쯤 나는 내가 인정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세인트님, 브런치 작가가 되었음을 축하합니다!"
또 누굴 속인 것 같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