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을 달리다

by 세인트

(몇 해 전 여름 쓴 글입니다)

지난주의 게으름이 맘에 걸려 오늘은 퇴근하자마자 곧바로 한강에 나가 달리기를 했다. 집 근처 뚝섬유원지에서 성수대교를 지나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 모퉁이의 소공원까지 약 7km를 왕복하는 단골코스.

간단히 준비운동을 마치고 손목의 스포츠 시계를 누른 뒤 좁은 보폭으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20년 넘도록 달리기를 즐기지만 초반은 여전히 힘들다. 다리도 묵직하고 호흡도 가쁘다. 그러게 처음에는 천천히 뛰며 몸을 살살 달랜다. 이후 10분쯤 지나면 습습 후후 하는 들숨과 날숨의 박자가 자연스러워지며 몸도 풀리기 시작한다. 이제 힘을 내야지!


뉴스에서는 올 6월이 역대 가장 더운 6월의 기온을 기록하고 있다지만, 오늘은 잔뜩 흐린 때문인지 바람도 제법 선선해서 달리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였다. 길가에는 짙어가는 초록이 가득하고 흩뿌려놓은 듯한 색색의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안녕? 인사한다. 상쾌하다. 하지만 폼으로 보아 초보일 것 같은 젊은이가 쌩! 추월해 지나니 슬쩍 약이 오른다. 나이 탓인지 예전처럼 빨리 달기기가 어렵다. 그래도 구력은 있어 천천히 오래 달리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그렇게 주장하고 싶다. 한창땐 뒷주머니에 바나나 하나 달랑 꽂고 대구 동촌유원지에서 구미 시민운동장까지 무려 일곱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던 경험도 있으니.


달리기 동호회에 가면 젊어서는 서브쓰리 같은 기록을 자랑하다가, 나이 들어 애를 써도 기록이 줄지 않으면 오래 달리는 것을 자랑삼는 이들이 있다.그리고 울트라마라톤이니 사막 마라톤 같은데로 눈을 돌린다. 하지만 나는 풀코스 몇 번 참가해 본 뒤로는 그저 동네에서 가볍게 달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겁다. 즐겁자고 달리는 데 죽자고 달릴 일이 뭐가 있나?


한 20분쯤 지났을까? 온몸이 땀으로 촉촉이 젖을 무렵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굵은 줄기로 변했다. 자전거를 달리던 사람들은 힘차게 페달을 밟고, 산책하던 사람들은 놀란 개미들처럼 허둥지둥 흩어진다. 여름날 달리기를 하다가 만나는 비는 얼마나 반가운지. 달리며 흠뻑 맞는 비는 마치 물속을 헤엄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따갑게 얼굴을 때리며 쏟아지는 소나기는 더욱 신난다. 시원한 빗줄기가 땀에 젖은 몸을 씻어 내리고, 젖은 신발은 2분의 2박자로 찔꺽찔꺽 소리를 내고, 세상의 소음들은 빗소리에 묻혀 오직 내 숨소리에만 집중하게 된다.


'빗속 달리기'의 즐거움을 알게 된 건 달리기를 즐기기 훨씬 전인 고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촌이나 다름없는 지역의 소도시 출신인 나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홀로 대구의 친척집에서 묵으며 학교를 다녔다. 남산동에 있던 D고등학교. 지금은 외곽으로 옮겼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당시 하굣길은 중심가인 동성로를 지나 신천교를 건너 C고등학교 근처에 있던 친척 집까지 시내버스를 타고도 제법 먼 길이었다.


토요일에는 교련 수업이 있어 교복 대신 교련복을 입고 등교했는데, 어느 토요일, 하교 시간에 비가 내려 우산을 챙기지 못한 나는 책가방의 손잡이를 양 어깨에 끼고 백팩처럼 매고 달렸다. 이유도 없이 그저 그러고 싶었다. 아마도 평일처럼 책이 많거나 교복차림이었으면 그러지 않았을 거다. 교련시간에 운동장을 뒹굴어 흙투성이인 교련복 차림인 데다 일종의 '예비군복 정서'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멀쩡한 신사도 예비군복만 입으면 아무 데나 주저앉고 드러눕는다"는.


비에 흠뻑 젖어 번화가인 대구백화점 앞을 지날 때 행인들의 "거참 희한한 놈이네" 하는 눈길이 느껴졌다. 혼자만의 착각이었겠지만 그걸 거라 생각했고, 그랬으면 했다. 이른바 '질풍노도 시기'의 반항끼와 허세로 가득한 소년이었으니까.


집에 도착해 빗물을 뚝뚝 흘리며 거실을 지나는데 작은어머니께서 "야야, 니 와 그라노?" 놀라시고는 물어도 대답도 없는 내가 걱정이 됐던지 엄마에게 전화하셨다. 이후에는 그 짓이 잦으니 원래 저런 놈인가 보다 하고 포기하신 것 같았다.


비에 젖은 옷을 입은 채 샤워기 아래 서면 묘한 쾌감에 웃음이 났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은 꺽꺽거리는 울음소리도 삼키고 눈물도 가려주었다. 그러고 나서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가 누우면 고향의 내 방처럼 스르르 잠이 왔다.


집을 떠나 온 외로움이나 부자인 친척집에 얹혀 지내는 열등감같은 것 때문 만은 아니었다. 뭔가 이유가 많았는데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빗속을 달리면 그 설명할 수 없는 무엇들이 숨이 턱턱 차오르고 심장이 터질듯한 고통과 뒤섞여 어느새 희열로 바뀌었다. 토요일을 기다렸고, 토요일에 비가 오기를 기다렸고, 비가 내리면 달렸다. 미친듯.


그런 만행을 저지르던 시절이 지나고 이제 나이가 들어 건강을 걱정하며 달리기를 한다. 달리는 길에 비를 만나는 건 여전히 즐겁다. 하지만 책가방을 둘러매고 빗속을 달리던 때의 숨가쁜 희열은 없다. 사라졌다. 인생이 긴 마라톤 코스 같지만, 지나고 나니 순식간의 백 미터 달리기다. 더 반항할 것을, 더 많이 허세 부릴 것을, 더 갖은 만행을 저지를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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