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어디서 돈 많은 노인네 소개받아 결혼하려 했어!'
말도 안 되는 농담 같은 소리를 딸애가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하는 바람에 마치 협박처럼 들렸다. 협박이 맞다. 몹시 아픈.
동생도 아프고 엄마도 아픈데 아빠까지 아프면 당장 병원비와 생활비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생각하니 그 보다 현실적인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단다. 그러면서 내게 이제라도 건강에 더 관심을 갖고 운동 열심히 하고 몸에 나쁜 것 절대 먹지 말라는 말을 덧붙인다.
건강검진을 받았다. 그리고 보름쯤 지나 퇴근하여 집에 와보니 우편함에 검사 결과지가 꽂혀있었다. 만성적인 증상으로 건강검진 때마다 특별히 대장 내시경과 간초음파 결과에 가슴을 졸인다. 결과지 봉투를 열어보니 지난번 검사 때와 달리 대장에 용종도 전혀 없고 간 수치는 조금 높은 편이나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다음 장을 넘겨 아래도 훑어 나가는데 소화기 소견 란에 '췌장 미부 종양이....'라는 글이 숨을 콱 멎게 한다.
무슨? 이게 무슨 말이지? 췌장? 미부? 종양?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읽어보니 '췌장 미부에 종양이 약 4cm...'라고 적혀있다. 게다가 좌측 부신에 낭종이...라고. 순간 몸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대체? 하여 다시 읽어도 그놈의 '선명한 종양 어쩌고' 하는 단어가 일말의 희망을 앗아간다.
두근 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아닐 거야, 뭔가 잘못된 걸 거야, 하며 휴대폰으로 그 낯선 이름의 질환을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되는 내용은 모두 내 상식으로는 알 수 없는 전문가나 알 수 있는 말들 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게 절망적인 것인지 일말의 희망이 있는 것인지 같은 정보를 원했는데 아무리 읽어봐도 알 수 없었다. 사실은 너무 걱정 마라 대단한 병이 아니다, 하는 내용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읽었으나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고 대체 쉽게 알 수 있는 설명이 없었다.
병원도 그렇다. 이런 증상이 발견되었는데 어려운 전문용어로 췌장 어쩌고 한 줄 달랑 써서 보내는 것이 말이 되나? 화가 났다. 담당의사가 전화를 해 좀 더 설명을 하고 내원을 할 것을 권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면 병원도 돈 벌고 나쁠게 뭐가 있다고, 싶었다. 결과지 아래 단 한 줄, "내원하여... 어쩌고 저쩌고"가 있을 뿐이다. 그 한 줄 만으로도 나 같은 사람은 다음날 곧장 달려오리라는 배짱인가? 했다. 무엇에든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병원 문을 열기를 기다려 달려갔다. 의사가 초음파 영상을 보는 동안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초조함을 누르며, 어떠냐, 크기가 3센티가 넘는다는데 어떠냐? 물으며 내심 별것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으나, 그는 그 정도면 큰 편이고 그러니 CT를 찍어봐야 정확한 걸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과이니 이제는 드러난 결과를 가지고 더 정확한 상황을 알아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CT촬영을 마치고 결과를 듣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은 마치 어둡고 깊은 터널을 기어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차례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먼저, 간수치는 어제 보다 더 낫게 나왔네요 라는 말로 시작했다. 좋은 소식부터 들려주는 건 과연 나쁜 소식을 이으려는 것일까, 아니면 모두 좋다는 신호일까. 그 짧은 순간의 긴장. 이어 췌장은 초음파 결과가 잘 못 된 것 같다고. 복부 가스 때문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며 CT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 하느님!... 이런 것을 한순간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것이라 하는 것일까? 나는 너무 기뻐 다시 물었다.
"그럼 정말 췌장은 괜찮은 것인가요?"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아내와 딸에게 전화를 걸어 알렸다. 아내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로,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한다. 딸애는 평소에 성당에 안 갔지만, 변기에 앉아 똥 잘 나오라고 기도하던 이후 첨으로 기도를 했는데 들어주셨다고 했다. 그 말에 웃다가 눈물이 났다.
무사히 끝난 해프닝이었지만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어디서 돈 많은 노인네 소개받아 결혼하려 했어!' 했던 딸애의 말이 여전히 가슴을 후벼 팠다. 때때로 딸애가 좀 못됐고 이기적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너무 착하고 너무 아빠를 좋아하면 가슴 아플 일이 많이 생길 텐데... 하고.
우리 가족은 모두들 집돌이 들이어서 직장을 가든 친구를 만나든 밖에 나가면 얼른 집에 올 생각부터 한다. 집에 꿀단지가 있어 그러는 것도 아닌데. 그저 모두 거실 소파에서 서로 치대며 지내는 걸 좋아한다. 오죽하면 아내는 "아이고 힘들어, 다 큰 것들이, 저리 좀 가! 너 빨리 시집 안 가니?" 한다. 그러면 덩치는 산만한 아들놈 조차 "아이 엄마가 좋아. 세상에서 엄마가 젤 좋아서 그러는 데에 "하며 더 파고든다.
나도 한마디 한다.
"아이고, 징그러운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