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은 일을 하고 대가를 받는 곳이다. 직딩들은 이 빤한 사실을 종종 잊는다. 아무래도 가정보다 더 오랜 시간을 머물고 동료들과도 매일 함께 하다 보니 직장이 일터인지 집인지 그 짬뽕인지 헛갈려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고상한 말로, '자기 방어기제' 때문일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곳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부정해야 몸과 마음이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 같은 회사'라는 아무도 믿지 않는 구호를 누구나 믿고 싶어 하는 비과학적인 심리상태가 된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한번 풀어서 말하면, 직장은 매일 아침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아직 젖은 머리카락을 다 말리지도 못한 채 앞머리에 롤을 만 채로 지하철을 타고 나서야 하는 곳이다. 그리고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상사와, 재수 없는 동료에게 영혼 없는 "좋은 아침!"을 시전 해야만 무사한 곳이다. 결코 집이 아니란 거다.
그럼 직장은 지옥인가? N0! 그렇지 않다. 나와 내 가족을 먹이고 입히고 재울 수 있게 하는 고마운 곳이 직장이다. 직장이 없다면 어떻게 그 많은 것이 가능할까? 수많은 구직자들이 '잡꿀이야'니 '알바지옥' 같은 취업사이트를 뒤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기실현? 말은 멋진데 가장 믿어지지 않는 이유 중 으뜸이다.
이달에 갚아야 할 카드대금을 주는 곳이 어디인가? 직장이다. 그런데도 회사 흡연구역 한쪽에 모여 서서 담배를 피우며 떠드는 소리의 반은 직장 욕이고, 상사 흉이고, 그 자리에 없는 동료 흉이고, 월급이 적다는 투덜거림이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고, 고급차 타면 애인과 골프 치러 가고 싶은 거다. 그 투덜댐의 본질이 그저 하는 소리고 스트레스 해소겠지만, 투덜댐은 하품처럼 전염된다. 이 전염병은 얼마나 지독한지 남의 투덜댐이 금세 내 투덜댐이 되고, 하나의 투덜이 또 하나의 투덜을 부르는 투덜 오감도가 된다. 그러다 어느 날, 동료의 투덜을 받아주고 함께 스트레스를 해소하느라 시작된 투덜댐이 무서운 칼날이 되어 나를 찌른다.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다.
기업 운영 중 한 번쯤은 맞게 되는 경영 위기에서 사장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구조조정이다. 인건비만큼 확실하게 비용을 줄이는 방법은 없다. 이때 평소 농담 반의 투덜댐이 내 뒤통수를 치게 된다. 직장에서 낮말은 같이 담배 피운 동료가 듣고, 밤말은 같이 야근한 선배가 듣는다. 투덜댈 땐 넘치던 동지애가 막상 구조조정 땐 칼날이 된다. 말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에게만 들리는 게 아니다. 직장에서의 말은 사무실 공조기를 통해 덕트 안을 떠돌다 어느 날 사장실 환기구를 통해 배출된다. 평판은 눈에 보이지 않다가 결정적일 때 드러난다.
직장에서는 똑똑한 놈은 다 나가거나 잘리고, 멍청한 놈들만 살아남는다는 말을 많이 한다. 똑똑해서 더 나은 자리로 간 경우야 다행이지만, 똑똑한데 잘리는 건 아무튼 불행이다. 그럼 어떻게 '멍청한 놈'은 살아남는가? 대체로 멍청이는 말이 없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니 그냥 찍어 먹으라면 찍어먹는다. 먹어보고 똥이면 뱉고 나서도 별 말이 없다. 그래서 멍청이다. 특별한 처세술이나 아부 기술도 없다. 그저 멍청하기에 반응이 없다.
물론 이런 직장이라면 멍청이가 되어 살아남는다 해도 큰 영광을 보지 못하겠지만, 아무튼 사장이 문을 닫기 전에는 정년퇴직이 가능하다. 따라서 멍청한 정년퇴직자는 그간의 월급과 퇴직금을 착실히 모아 강북에 20평대 아파트라도 장만한다. 자고 나면 아파트 값이 뛰는 축복은 멍청해서 얻은 덤이다. 그럼 똑똑한 투덜이는 어떻게 됐을까?
직장인들이 공무원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연봉이 높아서가 아니다. 바로 내일이 오늘과 같기 때문이다. 즉 예측이 가능하고 파도가 일지 않는다는 거다. 직원에게 좋은 직장은 그런 곳이다. 그러게 똑똑한 투덜이들이 회사의 발전을 얘기하고 실력 없는 상사를 비난하는 건 스스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날이 그날인 직장이 최고다.
당신이 매우 유능하여 투덜대다가 잘리건, 알아서 옮기건, 걱정이 없다면 사옥 뒤 편에서 담배꽁초에 침 뱉으며 투덜대도 문제없다. 하지만 유능하지 않다면 유능해져서 유능한 사람을 찾는 좋은 직장이 데려가는 날까지 입을 다무는 게 좋다. 직장에서 뭘 기대하나? 지랄 같은 상사가 있어도, 비록 적은 월급이나마 안 떼먹고 법정 휴가 주면 그 재미로 살면 된다. 직장은 칭송할 곳도 투덜댈 곳도 아닌, 같이 벌어서 나눠 쓰는 곳이다.
그게 너무 삭막하다 싶으면 가끔 동료들과 어울려 양념돼지 연탄구이 집에서 애사심이니 동료애니 하는 전설 속에 나오는 말로 건배를 들면 된다. 오래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 그렇게 버텼다. 멍청이가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