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창문을 활짝 열어보세요!"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 오다가 소아과에 들르니 감기환자가 많더군요"
후배 여자 아나운서가 한 명 있었다. 오후의 가요프로그램을 진행하던 그녀는 날씨가 좋으면 앞의 인사말을, 날이 추우면 뒤의 인사말로 오프닝을 삼았다. 요즘은 작가가 있어 그런 오프닝도 써주지만 내가 처음 방송일을 하던 시절의 지역방송사는 퍼스낼리티가 강조되는 음악프로그램의 오프닝은 여건상 진행자가 직접 쓰는 일이 많았다. 이처럼 그녀의 오프닝 멘트는 변함없는 사골국이어서 직원들이 재미 삼아 예측하기도 했다. 방송이 시작되는 시그날 음악이 흘러나오면, 오늘 날씨가 좋으니 보나 마나 창문 활짝 열라 할 거다. 추우니 소아과 들를 거다 하면서.
보다 못해 어느 날 불러서 물었다. 정말 출근하며 소아과 갔다 왔어요? 출근하기도 바쁠 텐데, 했더니 얼굴이 빨개지며 우물쭈물이다. 매번 감동적이거나 재치 있는 인사말을 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하나마나한 소리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타일렀다. 마음 상하게 할 것임을 알면서도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나로서는 직원들의 놀림감이 되도록 두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오늘도 또 창문을 열라 하겠네?" 하는 청취자가 있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나는 남다른 멘트가 아니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는 편이다. 그러니 날만 좋으면 창문 열라하고, 날이 추우면 감기조심하라는 인사말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하나마나한 소리는 들어서 별 감동이나 정보가 없는 소리라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잘 살아보세' '착하게 살자'라는 말은 좋은 말이지만 감동도 정보도 주지 못한다. 잘 살아보고 싶지 않은 사람 없고 착하게 살아야 복 받겠으나, 듣는 이에게는 아무런 감동이나 정보가 없다.
이렇게 "잘 살아보자", "착하게 살자"는 말만 담은 잡지가 있다. 그 안에는 세상에 좋은 말은 다 들어있다. 성서조차 그렇게 좋은 말만 담겨있지 않다. 성서를 열면 누가 누굴 낳았다는 아브라함네 족보가 지루하도록 한참 나열된 뒤에야 '좋은 말씀'이 나온다. 그러니 좋은 말만 잔뜩 모아놓은 잡지를 읽다가 이처럼 좋은 생각과 말이 넘치는 세상에 왜 이토록 불합리하고 모진 일들이 생길까 하는 깨달음, 아니, 심통이 났다. 그래서 어쩌라고?
연말이면 독거노인 댁에 연탄배달을 하거나 라면상자 잔뜩 쌓아놓고 사진을 찍는 정치인들의 기사가 난다. 사람들은 쑈 한다고 비웃는다. 그리고 온갖 좋은 말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얘기한다. 그러나 독거노인이 추위를 견디고 허기를 채우는 건 그 쑈 때문이다. 세상은 좋은 말로만 살아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SNS에 넘쳐나는 선하고 좋은 말들만으로도 세상은 이미 낙원이 됐을 거다.
연말이 다가왔다. '근하신년'이니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하나마나한 단체 문자가 "까톡까톡" 또는 "띠링띠링" 줄을 이을 것이다. 그 소리가 시끄러워 무음으로 한다. 때문에 "연말인데 뭐 하냐? 순댓국 맛있는 데 있어, 나와!" 이런 중요한 메시지를 못 받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한다. 하나마나한 소리나 하는 사람들이 책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