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 좋아하는 노래가 뭐예요?"
10대 때부터 쌍화점의 '죠고맛감 삿기 광대'처럼 방송국을 들락거리며 반평생 방송 음악프로그램을 만들었으니 뭔가 다른 대답이 나올 거라 여기는 질문이다. 하긴 그 정도 경력이면 묻는 이가 고개를 끄덕일만한 멋진 노래를 대야 하는데 너무 많으니 오히려 답을 못한다.
"젤 즐겨 부르는 노래는 있는데..."
"그건 뭔데요?"
'세월이 가면.'
1도 모르는 사람은 "그게 어떤 노래예요?" 하고, 2 정도 아는 사람은 "최호섭?" 한다.
"최호섭 노래도 좋지만, 그건 고음불가라 불가해. 호섭이도 가끔 고음 올리다 반음씩 틀리고 그러는데."
"그럼 어떤?"
"부른 사람이 하도 많아 누구 노래랄 것도 없어. 그래도 헤레나 루빈스타인! 연극배우 박정자가 젤 멋있더라. 지그음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마아안,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에 이이있네..."
첫 소절만 불러도 벌써 상대는 괜히 물어봤다는 표정이 된다.
하도 부끄러워 정확히 기억한다. 벌써 수십 년 전 일이지만.
고딩 2년 때, 성당에 열심인 친한 친구에게, 나도 어릴 때 유아영세를 받았다 하니 같이 성당 나가자고 꼬드겼다. 친구따라 강남에 갔으면 부자가 됐을 텐데 그날 성당엔 왜 따라갔는지.
미사를 마치고 친구와 학생회 모임에 가서 인사를 했다. 상석에 재수생 누나가 있었다. 예뻤다. 어두운 학생회 방의 사람들 사이에 그 누나의 하얀 얼굴만 눈에 들어왔다. 천사가 강림했대도 믿을만했다. 그러나 그 예쁘고 고운 자태와 달리 대뜸 반말을 건넸다.
"2학년? 공부 잘해? 노래 한 번 해봐!"
마치 조폭 마누라나 체 게바라 애첩같은 포스였다. 이런, 내가 깜빡 죽는 보이시함! 순간, 그 누나를 좋아해 버렸다.
안 그래도 낯가림이 심한 데다 속마음을 들킬까 얼굴이 달아오는데,
"뭘 꾸물대. 노래 못 해? 해 봐!" 한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노래를 조금씩 입밖에 내기 시작했다.
"지그음,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마아안, 그눈동자 입술으으은 내 가슴에에 이이있네에..."
어떻게 불렀는지 부끄러움에 입이 바짝 마르고 호흡은 가쁘고, 그래도 무사히 마쳤다.
사람들의 표정을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높낮이도 별로 없고, 또래들의 유행곡도 아니고, 그 지루한 노래를 참고 끝까지 들어준 것을 감사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혼 없는 박수에 이어 누나가 입을 열었다.
"염불하니?"
그리고 다시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고, 이후 그 누나와의 에피소드들이 많지만 이제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을 그 누나를 더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맥없이 노래를 흥얼 거릴 때면, 나도 모르게 그 노래를 부르고 있다."지그음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마아안..." 고음이 없어 부르기 편해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