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쓴 때가 벌써 6년 전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집을 팔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만, 평생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추억을 하나 더 갖게 되어 나름 의미 있는 시도였고 시간으로 기억합니다. 한겨울 언 손을 호호 불며 제 손으로 거의 6개월에 걸쳐 고친 집이라 더 애틋하기도 하고요.사진은 그 집을 고치기 직전 입니다. 지난 추억을 기억하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카페 앞마당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지난해에는 해걸이 하는 바람에 몇 개 열리지 않더니 올해는 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많이 달렸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마당을 쓸다 보면 익다만 감들이 떨어져 있어 텃밭농사를 농부보다 더 잘 짓는 길 건너 교회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건 감나무가 스스로 떨구는 거라네요. 그래야 남은 것들이 실하게 영근다고요. 저는 행여 병이 걸렸거나 양분이 부족해 그런 건가 했는데,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고향에서 뭔가 의미 있는 작업을 해보려 재작년 이 집을 처음 봤을 때가 시월이었는데, 감나무에 빨간 감이 꽃처럼 하나 가득 열려 보자마자 맘이 뺏겼습니다. 곧바로 계약을 하고 지금의 카페로 개조했죠. 마당이 있고 거기 커다란 나무 한그루 있는 오래된 집, 얼마나 그리던 그림이었는지 모릅니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인 진입로도 좋았고, 건너편 푹 꺼진 공터의 텃밭도 좋았습니다. 도시이면서도 시골 같은 분위기가 마음에 쏙 들었죠. 평생을 직장 일에 종종거리며 살았던 날들을 여기에 내려놓고 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감이 한 번 열렸고 또다시 열렸으니 카페를 연 지 벌써 이 년이 되어가네요. 가끔 새들이 쪼아서 물러버린 감이나, 다른 것 보다 조금 일찍 홍시가 된 것이 있어 사다리를 놓고 따고 있는데 옆집 아저씨가 왜 따느냐고 소리를 지릅니다. 제 집의 감을 제가 따는데 웬 참견인가 싶어 맘이 상했는데, “그거 얼마나 예쁜데, 그냥 꽃이 핀 거라 생각하고 다 떨어질 때까지 두면 얼마나 좋아, 손님들도 예쁘다고 그 앞에서 사진도 찍고 그러더구먼” 하는 말에 제 생각이 짧았구나 싶었습니다. 따먹는 것보다 오래오래 꽃처럼 두고 보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못 한 거죠.
카페를 만들어 마을 사람들과 음악회도 열고, 글쓰기와 독서 모임도 하고, 요즘은 발달장애인들이 친구를 사귈 수 있도록 팟캐스트 만들기도 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한 마을 카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제 집의 감도 제가 맘대로 딸 수 없게, 마치 자기 것처럼 이웃들이 참견하는 이유가 그런 거겠죠. 어둡고 지저분했던 동네에 편안히 드나들 수 있는 카페가 생겨 너무 좋다고 아껴주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뭘 더 재밌는 걸 만들까 생각할 때마다 퇴직 후 고향에 내려와 카페를 열기를 정말 잘했다 싶습니다.
일전에는 젊어서 독일에 간호사로 파견 가셨다는 동네 할머니께서 디자인도 예쁜 빈티지 오디오를 주셨습니다. 아끼시던 LP음반들과 함께요. 어린 나이에 돈을 벌려고, 말이 간호사이지 시신을 닦는 일 같은 힘든 일이나 하며, 너무나 고향이 그리워 한국 노래가 듣고 싶어 첫 월급으로 산 오디오랍니다. 그 말씀을 하시는데 울컥하더군요.
사실 마을카페라는 게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아직 저도 아직 잘 모르지만,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카페가 아닐까 합니다. 어제는 요 앞 초등학교 아이들 셋이 와서 초코 라테를 마시고 갔습니다. 알록달록 지갑에서 꼬깃꼬깃한 지폐와 동전을 꺼내 모으더니 두 잔을 시키고 세 개로 나눠달랍니다. 그게 귀여워 석 잔을 가득 채워줬습니다. 그걸 들고 쪼르르 다람쥐처럼 다락으로 올라갑니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자리고요.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고향을 떠나더라도, 방학이나 휴가때, “커피 할아버지 저 왔어요” 하고 찾아오는 날이 온다면 제가 그리던 마을 카페가 되겠지요.
어제 있던 것이 오늘 사라지는, 많은 것이 숨 가쁘게 변하고 깃털처럼 가벼운데, 동네마다 이웃집 마실 가듯 편안히 찾을 수 있는 오래고 깊은 공간 하나쯤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