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고향에서 카페를 하던 시절에 쓴 글입니다. 이때만 해도 대화하는 ai가 없었네요. 세상은 이토록 숨차게 달려갑니다)
아침 공기가 차가워졌다. 실내온도 섭씨 12도. 밤새 식은 에스프레소 머신의 전원 스위치를 켠다. 1, 0, 2번으로 표시되어 있는 전원 스위치는 좌우 1,2번 표시 사이의 중간인 0에 놓여있다. 먼저 예비 동작 기능인 1쪽으로 돌려 잠시 기다리 린다. 그러면 노란색 물 보충 표시가 켜지기도 하고 곧바로 주 동작을 하는 2번으로 돌려도 좋다는 파란색 표시가 켜지기도 한다.
매일 아침마다 하는 일이고, 지난 일 년 육 개월 아침마다 별일 없이 작동되었건만 이 순간은 늘 긴장한다. 그 짧은 몇 초 동안 정상임을 표시하는 파란 불이 들어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혹시라도 고장이 나면 영업을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비용도 만만치 않다. 더구나 지역 소도시라 수리기사를 서울에서 찾아야만 한다. 하지만 오늘도 별일 없이 파란 불이 켜지고, 나는 마음을 놓는다.
예전에 방송사에서 일할 때 만난 작가 L은 아침에 컴퓨터를 켤 때마다 "잘 잤니? 오늘도 잘해보자." 하고 말을 건넨다고 했다. 당시 L은 낡은 중고차를 타고 다녔는데, 한 번은 여행을 가다 가파른 산길에서 차가 힘들어하기에, "할 수 있어, 넌 지금 잘하고 있어" 하며 올라갔다고 했다. 그러다 사고 내지 말고 차를 바꾸라는 내 말에 대답 대신 유난히 큰 눈이 다 감기도록 웃기만 하던 L. 마치 인형과 대화하는 아이 같았다.
처음 컴퓨터를 배울 때, L에게 어떻게 하면 타자를 빨리 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채팅을 해보라기에, 그날 저녁 하이텔에 들어가 처음으로 인터넷 채팅이란 것을 했다. 채팅방의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닉네임만으로 대화를 했다. 가장무도회가 이럴까? 자신을 숨기고 얼굴을 가린채 교류를 하는 것에 묘한 재미가 있었다.
몇일 뒤, 덕분에 타자 실력도 좀 늘고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것에 신이 나 L에게 지난 일을 자랑했다. "잘 하셨어요, 재밌죠?" 할 줄 알았다. 그러나, "팀장님, 인터넷 세계도 현실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여기고 사람들을 만나세요. 익명 속에 숨지 마시고요." 했다.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마치 이중인격자처럼 여겨진 것만 같았다. 컴퓨터나 자동차도 사람을 대하듯 하는 L에게는 가상의 인터넷 세상도 현실과 같을 수밖에.
평소 신중하고 따뜻한 L의 품성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사물에 조차 마음을 담아 대하는 태도. 그런 그녀에게는 사소하고 쉽게 여겨도 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불현듯 나는 과연 타인을, 세상을 그런 눈으로 보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달라지고 싶었다. L처럼 세상을 다정한 눈으로 보는 따뜻한 마음을 갖고 싶었다. 이런저런 힘든 일로 나도 모르는 새 모질어지고, 내 속에 나 밖에 다른 무엇에게도 자리를 내어줄 수 없던 자신이 형편없는사람처럼 여겨졌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켜며, "오늘도 아무 일 없이 파란 불이 들어와 다오"라고 말을 건네든, 그저 스위치만 돌리든, 차이는 없을 것이다. 기계가 말을 알아듣는 것도 아닐 테니. 하지만 차가운 기계에게 인사를 건네고 말을 걸면 내 마음도 예열된 에스프레소 머신처럼 따뜻해지는 것 같다. 그리 되면 스스로 다정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고,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면 그 하루 모든 것에 정성을 기울일 것만 같다.
내 곁의 모든 것에 다정한 말을 건네는 건, 내가 내게, 세상이 내게, 다정히 대했으면 하는 맘이 아닐까. 운명이나 세상의 거대한 질서는 어쩔 수 없다 해도, 나만의 작은 세상은, 나의 하루는, 나의 마음과 태도로 충분히 상대적일 수 있겠다는 믿음. 다정한 날들이 쌓여 내가 행복해지고, 세상도 좀 더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 오늘 아침에도 파란 불로 나를 안심시켜준 에스프레소 머신에게 감사를, 그 믿음을 알려준 L에게도 고마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