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시 읽는 CEO

by 세인트

2010. 6. 29. [더클래식500] 북카페 Book & Tree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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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classic500.jpg?type=w2 저자: 고두현 펴낸 곳: 21세기 북스


(글 달라고 하면 뭐나 된 줄 알고 여기저기 잡글을 많이 쓰던 때, '클래식 500'이라는 시니어레지던스

웹진에 올린 10여 년 전의 글입니다. 브런치 하며 예전에 쓴 글들 찾아 갈무리합니다)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하라”. 필라코리아 윤윤수 사장의 말이다. 사업가는 사교적으로 매력적인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재미있고 다양한 화젯거리를 가진 사람이 사업에 성공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선수’들끼리 만나서 사업얘기 해봐야 빤하고, 그보다는 음악이나 영화 같은 것을 화제로 삼을 수 있어야 상대와 문화적 공감대가 생기고 친밀해져 결국 사업의 성공으로 이어진단다.


과거에는 사업가라고 하면 질펀한 접대와 편법에 능하고, 뭣하면 직원들의 ‘조인트’를 깔’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요즘 그랬다가는 아무리 월급을 많이 줘도 남아있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회사 야유회라도 있으면 ‘소녀시대’ 춤이라도 배워둬야 한다. 회사 내에서나 밖에서나 인간적이고 재미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CEO의 기본이 되었다.


몸치나 음치라서 춤과 노래에 자신이 없다면, 상황에 맞는 적절한 시 한 수 낭송하면 어떨까? 그중에서도 옛 시인들의 한시는 짧아서 외우기도 좋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현대시와 달리 여백의 은유와 감칠맛 나는 풍자로 가득하다. 게다가 간단한 해설마저 곁들인다면 백발백중 감탄사가 터질 것이다.


신기한 세상이다. 이런 정보도 있을까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하면, 어김없이 누군가가 올려놓은 자료가 있듯이, 수요가 있으면 반드시 공급이 있다. ‘옛 시 읽는 CEO’라는 책이 있다. ‘사진 읽는…’, ‘와인 읽는…’ 식의 ‘~하는 CEO’ 시리즈 중 하나로, 기자 시절부터 책에 대한 칼럼으로 유명하더니 결국 시인으로 등단한 고두현이 썼다. CEO를 위한다는 설정이야 홍보성 꼼수일 테니 그냥 월급쟁이를 비롯해 방바닥 긁고 있는 ‘취업 준비생’이 읽어도 좋은, 그리고 쉬운 내용이다.


초승달이 낫 같아

산마루의 나무를 베는데

땅 위에 넘어져도 소리 나지 않고

곁가지가 길 위에 가로 걸리네

-곽말약의 초승달(新月)


요즘 기업의 경쟁력은 상상력의 경쟁력이라고 한다. 아바타를 말하고 스티브 잡스를 말하지 않아도 이 시 한 수면 충분하다. 상상력은 초승달로 나무도 베게 하기에. ‘나를 재창조하는 생각의 여백’은 이 책의 부제다.

여백과 여운의 한시로 인생을 말하고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각각의 시를 사계절에 맞춰 구성해 계절에 어울리는 작품을 고르기 쉽고 글 사이에 담백한 수묵화가 배치돼 있어 시만큼 여유 있는 편집이 보기 좋다.


옆에서 보면 고갯마루 가로 보면 봉우리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제각기 다르구나

여산의 참모습을 알 수 없는 것은

이 몸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네


저자의 친구인 어느 기업 CEO가 직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소동파의 ‘서림사 벽에 쓰다’라는 시다. ‘사물 하나도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고 내부에 침잠된 사람 보다 밖에서 조감하는 사람에게 기업의 진면목이 더 잘 보인다’(7p)는 은유다. 생각하면 이 시를 낭송한 CEO도 멋있지만 듣고 나서 마음이 움직였다는 직원들은 더욱 멋지다. 그러니 제목만 보고, 이 책을 CEO가 돼서야 읽겠노라고 미룬다면 그전에 먼저 멋진 사원도 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훗날 멋진 CEO가 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하나 더. 이번 여름휴가 떠나는 가방에 챙겨가면 좋겠다. 책은 가볍고 글은 풍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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