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어라 색소폰아

by 세인트

갑수 씨는 오늘도 색소폰 가방을 메고 현관을 나선다.

"나 갔다 올게"

"술 먹지 말고 와!"

아내는 쳐보지도 않고 도마질을 한다.


몇 해 전 30년을 다닌 은행을 정년퇴직한 갑수 씨는 요즘 색소폰에 재미를 들여 동네 색소폰 동호회에 나가는 맛에 산다. 계기는 이봉조였다. 어릴 때 TV에서 본, 남궁원 저리 가라로 잘 생긴 그 사내가, 텁텁한 목소리의 마초 같은 그 경상도 사내가, 큼지막한 테너 색소폰으로, 갑수 씨의 표현대로라면 "곧 숨 끊어질 노인네처럼 스스스스" 바람 반, 소리 반'으로 색소폰을 부는 모습에 반했기 때문이다.


통기타를 배우러 다니는 동료들은 많았지만 갑수 씨 생각에 '사나이는 이봉조처럼 색소폰'이었다. 반짝반짝 황금빛의 몸통에서 울려 나오는 그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로 치자면 성대를 삼겹살 불판 닦는 쇠솔로 박박 문질러야만 나는 것같은 그 소리는, 화려하기만 한 트럼펫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섹시한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색소폰'이 '섹스폰'인줄로만 알았다.


처음에는 쉭쉭 바람 새는 소리만 나거나 삐익하는 소리만 내던 갑수 씨도 어언 1년이 넘다 보니 이제 쉬운 가요는 어지간하면 다 불 수 있게 되었다. 좀 어려운 것도 모두 다장조로 바꾸면 가능했다. 그래서 평소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들을 모두 색소폰으로 불었다. 제법 멋도 내서 불 수 있게 되었다. 김수희의 애모에서 '그대에 앞에만 서며언'의 '서며언' 부분을 그냥 '서며언'으로 불지 않고 피스를 문 입을 떨어 '서며어어어어언'이렇게 바이브레이션을 넣어서 부니 마치 이봉조가 된 것 같았다.


동호회에는 갑수 씨 또래의 중늙은이들이 많았다. 선배나 후배나 솜씨는 대부분 고만고만했다. 배운 지 오래되었다고 샵이나 플랫이 잔뜩 붙은 어려운 악보를 연주하는 것도 아니고, 잘 알려진, 한 잔 하면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를 갑수 씨처럼 모두 다장조로 바꿔 색소폰으로 불었다. 갑수 씨는 이렇게 하면 쉬운걸 작곡가들은 왜 조라는 걸 만들어 복잡하게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삼 년을 분 선배나 일 년도 안된 후배나 실력은 평준화되었다. 그들 스스로도 자신의 노래방 십팔번을 색소폰으로 연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한 번은 누가 와서 좀 아는 척, 존 콜트레인이니 찰리파커 얘기를 꺼냈다가 "니 똥 굵다"도 모자라 "칼라다"까지 챙겨 듣고는 울며 탈퇴했다는 소문도 있다. 이정식이나 케니지 까지만 했어도 '칼라'까지는 안 갔을텐데.


지난봄에는 뚝섬유원지 야외무대에서 동호인들의 공연무대에도 섰다. 거기서 갑수 씨네는 그동안 갈고닦은 솜씨를 마음껏 자랑했다. 가요뿐 아니라 베사메무초도 넣어 사회자의 말대로 나름 "화려한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성수동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중간에 누가 삑사리를 냈지만, 파트를 나누지 않고 여러 명이 한 멜로디만 연주하니 그 소리에 묻혀 아무도 몰랐다. 듣는 관중들도 그저 흥에 겨워 손뼉 치거나 나와서 몸을 흔들 수 있는 핑계만 된다면, 돼지 멱따는 소리로 육자배기를 불러도 상관없었다. 다만 잔디밭에서 치맥 먹던 젊은이들은 귀를 막고 자리를 옮겼다.


갑수 씨는 동호회 연습실 계단을 내려간다. 낡은 건물이라 삐걱대는 계단에 발을 딛자 안에서 회원들의 뒤섞인 연주 소리가 와글와글 맞이한다. 갑수 씨는 요즘 연습하고 있는 LOURA 를 오늘은 꼭 마스터해야지 하는 각오를 다지며 내려갔다. 갑수 씨가 이봉조 다음으로 색소폰에 마음을 뺏긴 계기는 바로 그 로우라 때문이었다.


군복무 시절 연병장 사열대에 임시로 만든 무대에서 위문공연이 있었다. 출연자는 유명 연예인이 아니고, 부대 근처 인천의 어느 나이트클럽 연예인들이었다. 모 신문이 '황강에서 승천하여 나라를 구할 용'이라 칭송한 군인이 대통령이던 시절이라, 지역 유흥업소가 탈 없이 영업하려면 그 정도 봉사활동은 흔한 것이었다.


비록 무명의 술집 연예인들이기는 했으나 밥, 잠, 여자, 이 3 결핍의 버짐이 낯짝에 허옇게 핀 군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더구나 대낮 훈련 시간에 위문공연이라니! 출연자 없이 빈 무대만 보여주어도 철모 깔고 앉아 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나이트클럽 전속가수와 '무희'들이 한바탕 무대를 꾸미고 난 뒤 잠시 조용하더니, 한 남자가 '스스스' 하며 달짝지근한 색소폰 독주를 시작했다. 구경 나온 군인가족의 꼬맹이들 조차 떠들던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사열대 뒤에서 한 여자가 오르더니 그 '스스스'에 맞춰 하나씩 둘 씩 껍질을 벗기 시작했다. 정말이다, 옷이라기보다 처음부터 그녀의 피부가 아닐까 싶은 찰싹 붙은 옷은, 마치 요염한 꽃뱀의 껍질 같았다. 벗지 않아도 이미 속이 훤히 들여다 뵈는 그 얇디얇은 가녀린 옷을 어찌 옷이라 부를까.


해는 중천에 떠 있고,봄날의 햇빛은 찬란하게 연병장을 내리쬐는데, 색소폰 남자는 눈을 질끈 감은채 스스스 하고, 꽃뱀 여자는 벗은 껍질을 하나씩 내던지다 드디어는 장판 위에 누워 다리를 벌렸다 오므렸다 절정의 순간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에 질세라 색소폰 남자도 한껏 고음을 끌어올려 대낮 연병장 꽃장판 위의 행위예술을 펼쳐 보였다. 군인가족 여자들은 "어머. 어머. 미쳤어!" 하며 아이들의 눈을 가렸고, 그러거나 말거나 색소폰은 슬피 울고 꽃뱀은 결국 최후의 껍질만 남기고 홀랑 벗어버렸다. 그 에로틱한 음악의 제목도 알 겸 이들을 섭외한 정훈병에게 물으니, 제목은 자기도 모르고 색소폰과 꽃뱀은 둘이 부부라고만 하며 킥킥 웃었다.


그날 갑수 씨를 흔든 건 꽃뱀은 물론이지만 그토록 에로틱한 음악이 더 궁금했다. 나중에 라디오에서 '이종환의 드이스크 쇼'를 듣다가 제목이 로우라라는 걸 알았다. 이후 로우라가 담긴 에이스 캐논의 색소폰 연주 음반을 사서 전축 바늘이 닳도록 듣고 또 들었다. 들을 때마다 눈을 감고 그 곡을 스스스 연주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이번 가을 동호회 공연 때는 바로 그 곡을 열심히 연습해 멋지게 독주해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갑수 씨가 연습을 하다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어 회원 중 가장 연장자이며 강사역을 하는 동호회 회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회장은 "갑수 씨는 이 음악이 왜 그리 좋으냐" 물었다. 갑수 씨가 지난 군대시절의 이야기를 하자, 회장은 눈을 크게 뜨고는,

"그럼, 혹시 군생활 인천에서?"

"네, 부개동"

"아... 몇 년도쯤?"

"80년도부터 삼 년요"

"..."

회장은 뭔가 말을 이을 듯 말듯 하더니 그냥 돌아선다. 돌아서 가는 회장의 뒤로" 왜, 그 부대 아세요?" 물으니 회장은 "아니 그냥 물어봤어요" 하고 가버렸다. 갑수 씨는 별 싱거운 양반이네, 하며 다시 로우라 스스스에 매진했다.


세 시, 어느덧 간식시간이다. 회비의 주 용도가 강사비와 연습실 임대료를 제외하면 대부분 간식비로 나간다. 사실 연주도 즐겁지만 또래의 동호인들끼리 친교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때문에 악기도 가져오지 않고 간식시간에만 어슬렁어슬렁 나타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동네 동호회가 비슷했다. 배드민턴 동호회니 등산 동호회니 그간 시간 보내느라 가입해본 동호회의 분위기는 다들 같았다. 처음에는 열심히 운동을 하다가 회원들과 가까와지면 운동은 뒷전이고 모여서 먹고 마시는 재미에 회비 내고 다닌다. 그게 또 사람 사는 재미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러다 눈이 맞는 커플도 있긴 하지만 한 동네라 거기까지 가는 일은 드물고, 그저 제 아내나 남편에게 못할 농담이나 주고 받는 것만해도 괜찮았다. 같은 농담을 아내에게 하면 "이 이는?" 하고 쌍심지를 켜는데, 동호회 여자들은 까르르 넘어가면 "오빠, 정말 재밌다"고 한다.


"자, 간식들 들고 하세요!" 언제나처럼 회장 사모님이 간식거리를 잔뜩 담은 바구니를 들고 들어온다. 나이가 들었어도 젊었을 때 미인 소리를 제법 들었을만한 외모다. 늘 조용조용 품위가 있다. 회원들이 농으로, 젊어서 선생님 하지 않았느냐 물을 정도다. 그러면 사모님은 배시시 웃기만 한다.


간식 때마다 빠지지 않는 막걸리가 한순배 돌고는, 갑수 씨는 앞서 회장이 묻던 말이 생각나 다시 화제에 올렸다. "회장님도 인천에서 근무하셨어요? 어느 부대인데요? 9 공수, 33사?" 회장은 대꾸를 않고 막거리잔만 들이켰다. 옆의 사모님은 무슨 얘긴가 싶어 "뭔데 뭔데요 갑수 씨, 이 사람이랑 뭐 재미난 얘기 하셨나 봐요?" 했다.


남자들 군대 얘기는 평생의 사골국이라 막걸리까지 한 잔 하니 평소 말이 많지 않던 갑수 씨도 수다스러워졌다. 술김에 우아한 사모님 놀리려는 장난기도 발동해, 좀 더 과장해서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아 글쎄 , 뻘건 대낮에 남편은 색소폰을 불고, 부인이라는 여자는 연병장에 깔아놓은 비닐 장판 위에서 몸부림치며 옷을 하나씩 벗는데.... 애들이 난리가 났어요", 그거 조명 아래에서 보는 거 하고 맛이 또 다르더라고! 허연 살덩어리가 눈앞에서 춤을 추는데, 환장하겠데! 그날 저녁 내무반이 난리가 났죠. 어떤 놈은 허리띠를 입에 물고 색소폰 흉내를 내고, 다른 놈은 그 여자 흉내를 내서 옷을 벗어던지고, 아마 밤에 신음 소리 내다 빤쓰적신 놈을 많았을 겁니다".


듣고 있던 남녀 회원들은 정말? 정말? 하며 낄낄 대고, 갑수 씨는 더욱 신이 나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배배 꼬며 꽃뱀의 흉내를 냈다. 모두들 어떻게 부부가 그러고 먹고 사느냐, 너 같음 니 마누라 그렇게 하겠느냐, 어떤 놈은 지 마누라 그러는 거 즐기는 변태도 있다더라며 웃고 떠드는 동안, 회장 부부가 조용히 자리를 뜨는 것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음날, 동호회 간식 시간에 사모님이 오지 않았다. 회원들은 간식타임인데 왜 사모님이 안 오시느냐, 회장에게 물었다. 회장은 아내가 몸이 아파 당분간 간식은 우리끼리 순번을 정해 사 오는 게 어떠냐고 했다. 이어 회장은 갑수 씨를 부르더니, "이번 연주회 때 로우라 말고 미스터 론리가 어떻겠냐"고 했다. 악보를 줄 테니 그걸 해보라고. 그게 더 쉽고 갑수 씨에게도 잘 어울릴 것 같다고. 그러나 갑수 씨는 여태 연습한 것도 있는데, 로우라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더 열심히 연습하겠다며.


그리고 그날 갑수 씨는 다른 날 보다 더 열심히 로우라를 불었다. 스스스스... 간식시간에 지난시절 얘기를 하고 나니 잊었던 그날의 장면이 다시 펼쳐졌다. 스스스... 그런데, 그때는 멀어서 보이지 않던 색소폰 남자와 꽃뱀의 얼굴이 점점 다가온다. 남자는 긴 머리를 볶아 꼬불꼬불하고, 꽃뱀은 가눈썹을 붙이고 진한 화장을 했지만 둘 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누구더라?, 아는 얼굴인데?" 스스스... 갑수 씨는 로우라를 불다 말고 갑자기 손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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