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 어떤 사람이 나와서 영국사람들은 오후 3시쯤 밀크티나 홍차와 함께 쿠키를 먹는단다. 영국에 가보지 않았으니 정말 그런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정말이라면 부러운 문화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식민지를 수탈했으면 그런 여유가 국민문화로 자리 잡았을까 싶기도 하다. 핀란드 사람들은 자기 전에 자일리톨 껌을 씹는다든가 불가리아 사람들은 모두 요구르트를 먹고 오래 산다는 식의 거짓말은 아닐지 모르겠다.
퇴직하고 양을 많이 줄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아침 식사 후, 그리고 오후 세시쯤 커피 한 잔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영국사람은 아니지만 맛있는 쿠키나 케잌이라도 곁들이면 더욱 행복하다. 고작 차 한잔이 주는 만족감이 그렇게 크다. 흔히 이런 것을 두고 소소한 행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소소할까?
소소하다고 말하는 그 행복을 누리는 데도 결코 소소하지 않은 노력들이 필요하다. 원두 생산의 값싼 노동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커피 한 잔을 내리기 위한 물이 필요하고 가스가 필요하고 전기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평소 내가 의식하지 않는 동안 준비가 된다. 나의 노동은 오직 원두를 갈고 물을 끓여 붓는 일뿐이다.
언젠가 아침에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물이 나오지 않은 적이 있다. 이미 입에는 치약거품을 잔뜩 물고 있던 상태라 더욱 난감했다. 냉장고에 있는 생수를 꺼내 겨우 입가심을 했지만 샤워는 불가능했다. 어제저녁 과음으로 머리는 산발이고 얼굴도 푸석한데 그대로 출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짜증이 확 올라왔다. 하루의 시작을 그렇게 망치니 종일 마음이 불안정하고 일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집에 보일러가 고장이 났다. 보일러란 잘 돌아가다가 일부러 추운 날을 택해 고장이 나는 것으로 존재의 가치를 드러내는 못된 놈임에 틀림없다. 서비스센터에 연락하니 빨라도 모레에나 가능하단다. 넣어두었던 전열기를 꺼내고 급히 전기장판을 구입하고 정신이 없었다. 그날도 하루를 그렇게 망쳤다.
그런 때면 평범한 일상이란 얼마나 연약한 기반 위에 얹혀있는 구조물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하나의 기둥만 삐끗해도 전부가 무너지는. 그러니 '아무 일 없는 평범한 일상'이라는 말은 '당장이라도 지옥이 될 수 있는 하루를 겨우 다독이며 유지한 상태'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고, 스위치를 누르면 전기가 들어오고, 시간이 되면 버스가 도착하고, 빨간 불이 켜지면 차량이 멈추고, 밤새 눈이 내리면 아침에는 말끔히 제설작업이 되어있고... 이런 일들이 바로 나의 '평범한' 일상을 만들어주는 요소들이다. 어느 것 하나 원래부터, 또는 저절로 작동되는 것은 없다. 그처럼 세상은 내게 호의롭다.
영국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차 한잔의 소소한 행복을 즐길 '권리'가 있다. 누가 한 말인지 '호의가 잦으면 권리로 안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 할 필요도 없이 잠깐만 생각해도 명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