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 김 시인 02

by 세인트

김 시인은 자신이 ‘품격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유지하는 데에는 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먼저 아침에 일어나면 주가를 확인하지 않았다. 평생 눈만 뜨면 하던 일을 끊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거실 창가에서 커피를 내리며 시집을 펼쳤다. '비움이란 가진 자만이 실천하는 용기다'그는 이 문장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해졌다.

"아, 그렇지. 가진 게 많아서 비울 수 있는 거지. 없는 사람들이 비운다는 건 사실, 그건 비움이 아니라 그냥 없는 거지".

김 시인은 자신의 이런 생각을 깊은 '사유'라 여겼다. 생각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자신과 같은 시인은생각이 아닌 사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문화센터에 도착하자, 마담이지만 마담이라 부르지 않는 수강생들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시인님, 오늘도 너무 기대돼요.”

“지난주 소개해주신 시인님의 시처럼 살려고 열심히 노력했어요.”

'시처럼 산다'. 그 말이야말로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다.


그날도 강의가 끝나고, 늘 그랬듯 카페로 이동했다. 김 시인은 이런 자리가 어색하다고 했다.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그렇다고 일부러 빠지지도 않았다. 시인은 고독해야 하지만 인맥은 그 못잖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무슨 수를, 아니 무슨 시를 써서라도 '시인'이 된 다음에는 인맥이 뒷받침되어야 진짜 시인이 된다. 어차피 시는 팔리지 않고, 문화센터나 주민센터에서라도 시를 강의해야만 계속 시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대학교 평생교육원 같은 데서라도 강의한다면 시인일 뿐 아니라 교수라 불러주기에 업계의 정점에 올랐다 할 수 있다. 이건 시인뿐 아니라 화가나 음악가도 마찬가지다. 교수가 아닌 화가, 교수가 아닌 음악가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그들 스스로 더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문화예술계에서 교수가 된다는 건 단순히 명예만 얻는 것이 아니라, 그의 후계자로 책봉되기 위한 수많은 제자들의 아부와 동시에, 그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염원을 넘치도록 받을 수 있다.


그러니 해바다 봄이 되면 새로운 수강생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 교수가 아닌 김 시인으로서는, 수강생들과 불가근불가원의 품격 있는 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 즉 너무 멀리 해도 안되고, 너무 가까워도 안된다. 멀리하면 수강생이 줄고 가까이하면 사고가 난다. 간혹 문학소녀 시절의 곱디고운 꿈을 지닌 채 나이 먹은 '문학마담'의 시에 대한 애정이 시인에 대한 애정으로 구체화 되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그 '문학마담'만 남고 다른 마담들이 다 떠나간다. 시인의 품격에 대한 실망 때문인지, 질투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시인님, 요즘 남편들이 너무 속물 같지 않아요?”

“돈만 아는 사람들, 진짜 싫어요.”

김 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아 마시는 라테 값은 그 속물 남편들이 벌어준 돈일 테지만, 그래도 자신은 속물이 아니고 싶어 하는 마담들이 기특해 보였다. "역시 압구정 마담들은 다르구나, 내가 수강생 복은 있구나".


정마담이 덧붙였다.

“저는 가끔 내가 너무 물질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 말에 다른 마담들이 호응을 했다.

“어머, 언니 진짜 생각이 깊다, 전 그런 생각조차 안 해봤어요"

“언니는 진짜 문학적이에요.”

김 시인은 웃었다. 그들은 ‘문학’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어 정마담이 진지하게 물었다.

“시인님은요? 시인님은 또래의 남자들과 달리 어떻게 그렇게 속물 같지 않으세요?”

시인은 시인답게 천천히 말했다.

“저는... 사실 속물이 되기가 어려워요.”

마담들이 숨을 들이켰다. 속물이 되기 어렵다니, 이게 무슨 시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일까?

시인이 말을 이었다.

“속물은 물질을 추구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물질을 추구할 필요가 없어요.”

정마담의 눈빛이 흔들렸다.

김 시인은 천장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쉰 뒤,

“저는 이미... 충분히 가졌으니까요.”

마담들이 동시에 “아! 하고 탄성을 냈다. 정마담을 시작으로 와르르 박수를 쳤다. 조용하던 카페에 갑작스러운 박수소리가 터지자 손님들이 놀라서 쳐다봤으나 "역시 아줌마들이란..." 하는 표정으로 곧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시로 삶의 허기를 채우는 압구정 마담들도 젊은 손님들 눈에는 그저 똑같은 동네 아줌마일 뿐이다. 같이 앉은 아저씨도 마찬가지고. 그가 시인이든 재벌이든 그저 시쓰는 늙은이, 돈 많은 늙은이일 뿐이다.


그날 오후, 김 시인은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걸었다. 그곳에 볼일이 없는데도 화려한 거리를 걸으면 화려한 거리에 볼일이 많은 화려한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았다. 자신뿐 아니라 그 거리를 오가는 많은 젊은이들도 그래서 화려해 보였다. 그때 문화센터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다음 분기 강좌를 확대하려고 해요. 이번엔 ‘시 낭독회’도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백화점 VIP 고객들을 따로 초청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김 시인은 짧게 말했다.

“좋죠.”

하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꽃이 활짝 피었다. VIP라니! 압구정에서 VIP는 종교다. 그는 상상했다. 조명 아래에서 자신이 시를 낭독하는 모습과 그를 보는 이들의 부러움의 시선을. 이 동네에서는 발길에 채는 자기 같은 대기업 임원 출신조차 쉽게 얻지 못하는 이름 V...I...그리고P. 그 '매우 중요한 인간'들인 VIP들 앞에서 낭송을 한다면, 하나도 안 중요한 인간인 시 좀 쓴다는 101동 '전직 김 상무'에서 진짜 김 시인으로 대접받을 것이다..


낭독회 당일, 문화센터 강의실은 작은 무대가 됐다. 마담들은 평소보다 더 화려하게 차려입고 왔다. 시를 들으러 온 게 아니라, 시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러 온 것이다. 마땅하다. 장소와 성격에 맞는 드레스코드를 갖출 줄 아는 것은 복식을 통한 예의라 하겠다. 결코 돈 있는 티를 내는 것이 아니다.


김 시인이 원고를 들고 마이크 앞에 섰다. 제목은 ‘비움’.


“비운다는 것은

내 안에 남아 있던
천박함을 내려놓는 것”


마담들이 감탄했다, 언제나처럼. 그들은 시인이 숨만 쉬어도 감탄사를 뱉을 지경이다. 시인의 말은 모두 자신들은 쉽게 알 수 없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을 거라 여기기 때문이다.

“어머!”

“천박함!"

“진짜, 우린 내려놔야 돼"


그다음 시는 ‘가난’이었다. 김 시인은 천천히 읽었다. '모두가 잠든 일요일 새벽, 적화야욕에 물든 이리떼들이 탱크를 몰고 삼팔선을 넘어와'도 시를 빨리 읽는 법은 없다. 시는 그처럼 귀한 것이다.


“가난은,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품격이 없는 것이다”


아직 시를 반도 안 읽었는데 어떤 마담은 눈시울을 붉혔다. 시로인해 사회의 부조리함이나 부의 편중 같은 것을 이해한 것 같았다. 김 시인은 계속 읽었다.


“돈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품격은
가진 자만이 갖는다”


잠시 객석이 웅성거리더니 이어 박수가 터졌다. 누군가 모두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이건 거의 철학이야!"

그 말을 들으니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자꾸 생각하니 그런 것 같았다. "시가 아니라 철학이군..."


아마도 '품격은 가진 자만이 갖는다...'이 구절이 VIP들의 마음을 건드린 것 같았다. 그간 부동산 졸부들이 자신들의 오랜 구역인 압구정동에 기웃거리는 것이 못마땅했는데, 그 자들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선대 때부터 법관이나 병원장, 교육재단 이사장 같은 내력 있는 자신들의 집안과는'끕'이다르다는 것을 표현한 시였기 때문이다. 김소월도 서정주도 이런 시는 쓰지는 않았다. 안 쓴 게 사실이지 않은가.


시가 안 팔리는 이유는 독자의 공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건 시인들이 잘난 척 제 생각만 말하지, 이처럼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듣기를 원한다. 부자에게는 '품격은 가진 자만의 것'이라 하고, 부자 아닌 사람들에게는 '무소유가 행복'이라 말해야 한다.


일찍이 이 사실을 간파한 어떤 시인은 부자보다 훨씬 그 수가 많은 부자 아닌 사람들을 위한 '무소유' 시를 써서 유명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시를 뒷받침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이 널린 인도를 드나들며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도 명상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설파했다. 사흘 굶으면 명상에 들지 않아도 몽롱하게 무지개가 보이지만.


아무튼 그의 영향으로 배낭여행족들 사이에서는 인도를 갔다 오지 않으면 입도 떼지 못하게 되었고, 바빠서 못갔다면, 갔다 온 친구에게 인도 스티커라도 얻어 캐리어에 덕지덕지 붙여야만 했다. 그 뿐 아니라 요가 학원이 넘쳐나며 서로 진짜 인도산이라 다투더니, 급기야 방에 군불을 지펴 땀을 빼는 핫요가라는 신종 요가도 생겨났다. 인도는 더울텐데 군불을 때는지는 잘 모르겠다.


난해한 예술적 시보다 독자들이 듣고싶은 말을 해주는 시 하나가 이렇게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압구정 김 시인의 시도 그와 같은 것이어서 VIP들을 쉽게 감동시켰다. 평소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쉽게'도 인기 시인이 되는 핵심이다.


(요청한 비난이 없어 비난받을 정도의 형편없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냉큼 2편을 올렸습니다. 현명한 자는 타인의 침묵을 경계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 침묵을 칭찬으로 여기는 법이라... 계속 비난이 없으면 3편도 올릴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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