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직전에
2장. UPBEAT - 시작 직전에
재즈에서 '업비트(Upbeat)'는 한 마디가 약박(Weak beat)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흔히 리듬이라 하면 '강-약-강-약'의 규칙적인 발걸음을 떠올리지만, 재즈는 그 질서를 거부한다. 슬쩍 비껴간 자리, 즉 낮은 소리의 약박이 먼저 치고 들어오며 리듬을 흔드는 순간 비로소 재즈의 본질인 약-강-약-강 '스윙(Swing)'이 태어난다.
업비트는 단순히 박자와 박자 사이의 빈 공간이 아니라 연주자가 다음의 강박을 어디로 밀어 올릴지, 어떤 에너지를 쏟아낼지 결정하는 가장 치열한 설계의 구간이다. 그 짧고 보이지 않는 틈을 통과해서야 리듬은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추진력을 얻는다.
이 보이지 않는 시작은 우리 삶과 닮았다. 세상은 대개 눈에 보이는 결과나 요란한 선언이 있을 때 비로소 무언가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한다. 하지만 진짜 시작은 언제나 그보다 앞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약박의 시간에 존재한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이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하는 찰나, 말로 설명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지만 어렴풋이 느끼게 되는 순간. 삶의 모든 위대한 전환은 그렇게 고요하고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삶이 '약박'에 머물러 있다고 느끼며 불안해한다. 주인공이 아닌 것 같고, 박자의 중심에서 비껴 있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에 내 소리가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아 초조해진다. 그러나 업비트가 작은 소리로 정형화된 리듬의 틀을 깨뜨리듯, 삶의 거대한 이동도 미세한 균열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생각의 방향이 아주 조금 바뀌고, 감정의 온도가 달라지며, 예전이라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방향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의 업비트가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사람들은 빙하가 무너져 내리는 장엄한 순간에 감탄하지만, 사실 빙하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내부의 미세한 균열을 통해 무너질 준비를 마친 상태다. 우리가 만나는 삶의 '갑작스러운 시작'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 일도 없던 무료한 하루, 길게 이어진 망설임,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생각들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 순간 결과라는 이름의 강박자가 터져 나온다. 그러니 지금 당장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정체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지금 다음 마디의 스윙을 결정짓는 가장 조용한 구간을 지나고 있을지 모른다.
겉으로 보면 여전히 어제와 같은 하루지만, 안쪽에서는 전혀 다른 배열이 완성되고 있는 상태. 그 변화가 너무 작아 당장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그 미세한 이동 하나가 전혀 다른 장면으로 인도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대개 이런 순간을 알아보지 못한다. 조용하고 평범하며, 무엇보다 너무나 일상적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정확한 시작의 시점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늦지 않게 알아차리는 예민한 감각일지도 모른다. 그런 인식이 생기는 순간, 시간은 같은 자리에서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겉은 여전하지만 속에서는 되돌릴 수 없는 움직임이 조용히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시작이 확신과 함께 온다면 삶은 명쾌하겠지만, 대부분은 아주 작은 예감으로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무언가 낯선 감각. 아직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 어딘가 이전과는 같지 않은 생경한 기분. 우리는 종종 이 신호를 무시한다. 더 분명한 증거와 확신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비릿한 예감의 정체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잠시 멈춰 서서 그 미세한 움직임을 응시하게 되는 날이 있다. 확신은 없지만 되돌아갈 마음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 꼬집어 표현할 수는 없어도 방향만은 분명히 느껴지는 시간. 어쩌면 그 정도의 자각만으로도 시작은 충분할지 모른다.
시작을 증명하지 못해도 이미 시작되었음을 감지하는 것. 그것은 업비트의 약박 다음에 반드시 강박이 오는 재즈와 같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의 순간조차 다음 소리를 준비하는 구간이다.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이 고요한 시간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공백일까, 아니면 이미 시작되었으나 이름 붙여지지 않은 도입부일까. 그 차이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조용한 순간 속에서도 다음 소리의 방향을 미리 느낄 수 있다면, 그 감각만으로도 나의 일상은 이전과 다른 얼굴을 갖게 될 것이다. 나의 삶이 지금은 약박자에 머물러 있다 해도 곧이어 강박자를 당겨와 근사한 스윙을 만들어낼 것이다. 재즈도 인생도, 시작은 짜릿한 업비트다.(수필/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