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낭송회에서 박수를 받은 이후 김 시인의 강의는 더욱 번창했다. 이제 수강생들은 그를 '압구정의 괴테'라 치켜세웠고, 백화점 측은 그에게 VIP 발레 파킹 권한까지 주었다. 그것은 김 시인이 시를 써서 얻은 몇 푼의 원고료와는 비교가 안 되는 명예로움이었다. 마이바흐나 포르셰도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압구정 백화점에서 주차 대기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편리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자부심을 주는 특권이었다. 발레 요원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차 키를 건네는 건 그 어떤 시의 종결 어미보다 깔끔했다.
그날은 김 시인이 '무소유와 자아의 확장'이라는 주제로 열강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강의실 뒷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한 사람. 때에 절은 점퍼를 입고 쿰쿰한 소주 냄새를 풍기는 중년 사내였다. 그는 다짜고짜 맨 앞줄 정마담 옆자리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정마담은 질겁하며, 쫒겨난 대통령 부인도 탐냈다는, '조그만 파우치'를 품에 안았고, 강의실은 일순 찬물이 끼얹어졌다. 에어컨 바람을 타고 흐르던 은은한 디퓨저 향이 거친 소주냄새에 맥없이 밀려났다. 김 시인은 짐짓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점잖게 물었다.
"누구신지? 여긴 시 쓰기 교실입니다만..."
사내는 김 시인을 빤히 쳐다보더니 껄껄 웃었다. 누런 이 사이로 삶의 비린내가 새어 나왔다.
"어이, 김 상무. 아니, 이제 김 시인인가? 나 기억 안 나? 나 박 기사여. 자네 증권사 있을 때 5년을 모셨던 박 기사!"
순간 김 시인의 얼굴이 흙빛이 됐다. 그는 김 시인이 증권사 상무 시절, 무리한 투자를 권유해 퇴직금을 홀랑 날렸던 바로 그 박 기사였다. 김 시인 때문에 '무소유'를 강제로 실천하게 된 장본인이자, 김 시인이 지우고 싶은 '유소유' 시절의 가장 부끄러운 증인이었다.
"자네가 이 동네 신문에 나오데? '무소유'라는 시가 인기라며? 그래서 나도 좀 배우러 왔지. 자네가 내 통장을 '무(無)'로 만들어줬으니, 나야말로 무소유의 수제자 아니여?"
마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김 상무'라는 호칭과 '퇴직금'이라는 단어는 이 격조 있는 시를 논하는 강의실에 어울리지 않는 불순물이었다. 김 시인은 이 위기를 벗어나야 했다. 그것도 문학적으로. 김 시인은 여유롭게 미소까지 지으면 마담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보십시오. 시는 때로 이렇게 예고 없이 우리 삶을 찾아옵니다. 이분은 제가 시적 영감을 얻기 위해 오랫동안 지켜봐 온, 저의 '가난 페르소나'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공된 가난이 아닌, 실제 삶의 거친 숨결을 마주하게 된 겁니다."
마담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경이로움으로 변했다.
"어머, 역시 시인님. 수업을 위해 배우까지 섭외하신 거예요?"
"진짜 리얼하다. 저 냄새 봐, 연기치고는 너무 디테일하다!"
박 기사는 어안이 벙벙했다. 원수를 갚으러 왔는데, 졸지에 '예술적 소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소리를 질렀다.
"무슨 연기여! 야, 김 상무! 너 내 돈 내놔! 네가 무소유면 나는 무생물이야, 이 자식아!"
김 시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읊조렸다.
"들으셨습니까. '나는 무생물이다'. 이 얼마나 처절한 존재론적 고백입니까. 박 선생, 그 분노를 문장으로 다듬으세요. 그것이 시가 됩니다."
정마담이 감동한 듯 수첩에 받아 적었다. '가난은 소리를 지른다. 그것은 시가 되지 못한 비명이다.' 마담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박 기사는 몰려드는 마담들의 향수 냄새와 박수 소리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강의실을 뛰쳐나갔다.
박 기사가 나간 뒤 정적이 이어졌다. 마담들은 방금 본 것이 예술인지 실제 상황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김 시인은 이 짧은 침묵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을 감추려 분필 가루를 털어내며 입을 뗐다.
“여러분, 방금 보신 것이 바로 시의 민낯입니다. 가난은 우아한 단어로 포장될 때보다, 저렇게 거칠고 악취 나는 모습으로 우리를 습격할 때 비로소 완성되죠.”
정마담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시인님, 저분 정말 배우가 아니라, 진짜로 시인님 때문에 돈을 잃은 사람인가요?”
김 시인은 허공을 응시하던 시선을 거두며,
“세상에는 시인이 대신 져야 할 업보가 있습니다. 제가 그분의 돈을 잃게 한 게 아니라, 자본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그분을 덮칠 때, 제가 그의 곁에 있었다는 죄책감, 저는 그 부채 의식을 평생 시로 갚고 있는 중입니다.”
마담들의 눈에 조금씩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어머, 세상에... 시인님은 저분의 원망까지 예술로 승화시키고 계셨던 거네요.”
“진짜 대인배시다. 역시 시인은 영혼의 깊이가 달라.”
김 시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증권사 상무 출신다운 순발력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김 시인은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걸으며 복잡한 심경에 빠졌다. 박 기사가 외친 ‘무생물’이라는 단어가 귓가에 쟁쟁했다. 그는 단골 술집에서 싱글 몰트를 주문했다. 그리고 수첩을 꺼내 들었다. 방금 겪은 수치심조차 시로 승화시켜야만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가난은 냄새로 온다
지워지지 않는 땀과 소주의 냄새
나는 그 냄새를 씻기 위해
다시 시라는 향수를 뿌린다’
김 시인은 웃음을 지었다. 스스로도 참으로 영리한 시구나 싶었다. 이 시가 발표되면 마담들은 또다시 ‘솔직하고 고뇌하는 시인’이라며 열광할 것이 빤했다. 김 시인에게 시란 진실을 말하는 도구가 아니라, 진실을 가장 예쁘게 가공하는 포장지였다. 어차피 시란 '지어내는 것' 아니냐,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박 기사에게 보낼 카톡 메시지를 썼다.
'박 기사, 오늘 출연료치고는 꽤 두둑하게 입금했네. 다음 학기에도 가끔 들러주게. 자네가 올 때마다 내 수강료가 올라갈 거거든. 자네의 분노가 내 시의 영감이 되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상생이란 것 아니겠나?'
전송 버튼을 누르고는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압구정 김 시인의 품격은 그렇게 타인의 고통을 ‘적절한 비용’으로 지불하며 유지되었다. 그것만 해도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술이나 얻어 마시는, 성북동 비둘기 같은 가난한 시인들과 달리 현실과 이상의 균형을 가진 품격있는 시인이 아닌가 자부하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