빤쓰 벗어던지다

by 세인트

The young ones
Darling we're the young ones
And the young ones shouldn't be afraid

To live love
While the flame is strong

‘cause we may not be the young ones very long~

얘들아,

우리 젊잔여?

힘이 불끈 이글거리는데

사랑하고 사는 게 뭣이 두려워

젊은 날이 주야장천 긴 게 아녀~


그 옛날 클리프 리처드라는 영국 가수가 광화문 시민회관에서 궁디를 흔들며 노래하는 바람에, 그 시절 전봇대처럼 뻣뻣이 서서 노래하던 가수들과 달리, 그것도 잘 생긴 서양 사내의 교태를 실물로 보게 된 동방예의지국의 색시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성을 지르고 난리도 아닌 사건이 있었다. 지금도 당시 대한늬우스에서 촬영한 그 흑백영상을 찾아보면 도저히 신사임당의 후예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도발적이다.


특히 집에 돈도 좀 있는 데다 남자 보기를 우습게 보는 승깔 있는 여자애들이 많다는 이화여대 학생들이 무대 앞에서 '빤쓰를 벗어던졌다'는 소문이 나돌아, 점잖은 신문들이 사설까지 실어 이를 개탄하기도 했다. 정말 빤쓰를 벗어던졌는지는 물증은 없다. 클리프 리처드가 얼씨구나 모조리 주워갔거나, 헛소문 중 하나일 것이다. 던졌어도 설마 입던 걸 '벗어' 던졌겠느냐, 따로 준비한 걸 던졌거나 손수건이겠지라고 해석하는 온건파도 있었다.


'빤쓰를 벗어던진다'는 말은 점잖지 못 한 표현이다. 그러니 그를 글로 쓰는 것은 더욱 불경스러운 짓이라 하겠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말을 굳이 글로 쓰지 않는다는 건 문학에 대한 도리가 아니기도 하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인간사 모든 희로애락을 깊이 들여다 보거나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점잖지 못한 말도 인간 잡사의 일부이므로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 될 것임이 자명하다 하겠다.


‘빤쓰’의 본질은 보호가 아니라 ‘은폐’다. 인간이 짐승과 결별하며 마지막으로 합의한 문명의 마지노선이자, 예의 염치라는 명분의 최후 보루다. 넥타이를 매고 사회적 지위를 운운하는 사람들도, 그 번듯한 껍데기 안에 빤쓰 한 장 달랑 걸친 채 제 알몸의 치부를 필사적으로 가리고 산다.


이대생들이 정말로 속옷을 벗어던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소문만으로 온 나라의 점잖은 양반들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들이 분노한 진짜 이유는 처녀들의 품행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감히 자신들은 엄두 내지 못하는 ‘위선의 해체’를, 새파란 여자들이 단숨에 실행해 버린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과, 꽃미남 '양놈' 앞에서라는 질투의 호박범벅일것이다.


누구나 겉으로는 고매한 인격을 가장하며 살아가지만, 그 얇은 천 한 장이 주는 안도감에 기대어 겨우 '사회적 인간'의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가끔 누군가 실수로 지퍼를 내린 채 활보하고 있더라도 너무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저 그가 잠시 문명의 구속을 잊고 진정한 자아를 환기하고 있는 중이라 봐줄 일이다.


나이 때문인지 깜빡 동대문을 개방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내가 칠칠맞다고 놀린다. 나는 피교육자 집안의 배운 사람답게 철학적으로 변명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있는 말 없는 말을 주워 담아 이렇게 쓴다. 먼저 아내에게 읽어보라 할 것이고, 이어 나같이 동대문을 개방하는 일이 잦은 사내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함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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