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by 세인트

기독교의 주기도문은 구교와 신교가 조금 다르긴 해도 내용은 같다. 먼저 우리를 이러저러한 죄를 짓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 빌고는 마지막에 가서 '다만' 악에서 우리를 구해달라 기도한다. 나약한 인간이 스스로 악의 유혹을 떨치기 어려우니 주님께서 '다만', 즉, '그러니까', '오히려', '심지어', 나를 구해주십사 하는 것이다.

그러니 앞에서 어떤 유혹이나 악이, 보이스피싱 같은 게 꼬드겨도 마지막 '다만'으로 인해 일거에 해결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 '다만'은 5 공시절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기 위해 쏟아냈던 젖소부인류 에로영화의 단골 부사어이기도 하다. 돈은 많으나 자신을 보듬지 않는 남편 때문에 외로운 사모님이 김기사든, 벨을 두 번 울리는 우편배달부든과 바람이 난다. 그러다 들키면 울며 용서하라 하면서도 "다만"이라 한다. 다만 당신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 밤이 외로웠다고. 그러면 남자도 반성하며 다시 정다운 부부가 된다는 얘기.


이쪽 전문인가 보다 하는 오해를 받을까 망설이다 하나 더하면, 그 시절 '영자의 전성시대'류의 3류 호스티스 영화도 이 '다만'의 요술을 발휘한다. 영화 시작부터 스크린이 살색과 신음으로 가득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주인공 호스티스아가씨가 관객을 향해 울부짖는다. 내가 몸뚱이 팔아먹고 사는 건 다만 가난을 벗기 힘든 세상 탓이고, 다만 여자를 노리개로 아는 사내들 탓이라고 절규한다. 그 한마디로 3류 에로 영화가 졸지에 사회성 짙은 문제작으로 둔갑하며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내란이라는 엄청난 죄를 지은 사람을 두고 판사가 죄상을 잔뜩 읊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이 '다만'이라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부사를 사용해, "다만, 이러저러하니 죽을죄는 아니고 무기징역입니다앙" 하고 선고했다. 애교 섞인 콧소리까지 더하니 죄가 더 가벼운 느낌도 들었다.


좌우지간, 어쨌든, 심지어, 그러나... 국어사전에 부사는 널렸다. 뭐든 핑계를 대고 싶을 땐 언제라도 사전을 펼쳐보라. 세상없는 잘못을 해도 우리말의 그 풍성한 부사로 인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부사가 풍부한 만큼 정도 많고, 용서도 많고, 처음엔 야단이다가 얼마 안 가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도 많다. 그 나라 말은 그 나라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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