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NOTE

슬픔 속에 감춰진 눈부신 푸른빛

by 세인트

10. BLUE NOTE - 슬픔 속에 감춰진 눈부신 푸른빛

재즈에는 단조도 장조도 아닌, 묘하게 미끄러지는 듯한 음을 만날 때가 있다. 이는 연주자가 음과 음 사이를 미세하게 굴리거나, 현을 팽팽하게 당겼다 놓으며 정해진 음정에서 아주 살짝 비껴나게 만드는 소리다. 음악 이론에서는 이를 '블루 노트(Blue Note)'라고 부른다. 메이저 스케일에서 3도, 5도, 7도 음을 반음 낮추어 연주하되, 그 고정된 수치마저 넘어서는 애수 섞인 느낌을 담아내는 것이 핵심이다. 완벽하게 조율된 음정에서 기어이 미끄러져 내려온 이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슬픔을 건드리며 묘한 위안을 준다.


'푸르다'는 말을 슬픔과 닮았다. 영어의 'Blue'가 그렇고, 재즈의 뿌리인 'Blues'가 그렇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푸른빛의 슬픔이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와 짝을 이룬다는 것이다. '슬프도록 아름답다'는 표현은 있어도, '기쁘도록 아름답다'는 말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기쁨은 그 자체로 환하고 충만하지만, 누군가의 영혼을 흔들어 흔적을 남기는 미학은 대개 푸른 슬픔을 통과하며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푸르다'는 말은 어쩌면 '아름답다'는 말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도자기를 굽는 장인들이 공을 들여 빚어내는 청자의 비색(翡色)이나, 깊고 그윽한 쪽빛을 머금은 '재팬 블루(Japan Blue)'를 떠올려보자. 그 서늘하고도 깊은 푸른색을 마주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감탄을 넘어 경외심마저 느끼게 된다. 그 색 안에는 수만 번의 손길과 불길을 견뎌낸 인고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묵묵히 받아들인 고독이 서려 있다.


재즈의 블루 노트 역시 마찬가지다. 귀에 익은 안정적인 화성의 질서를 의도적으로 무너뜨리고, 정음에서 미끄러져 내려온 그 불안정한 음정은 화려한 기교보다 더 깊은 인간적 고뇌를 담아낸다. 매끈하게 안도감을 주는 '도-미-솔'의 장화음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 즉 결핍과 상처가 묻어나는 그 푸른 소리 안에 영혼을 흔드는 비밀이 숨어 있다. 사람들은 완벽하게 들어맞는 소리에서 편안함을 느끼지만, 정해진 궤도를 이탈해 부유하는 그 불안한운 음에서 비로소 자신의 숨겨진 슬픔을 발견하고 위로받는다.


일상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블루 노트는 대개 화려한 소음이 걷힌 뒤의 정적 속에서 찾아온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 왁자지껄 보낸 저녁 시간. 누군가의 성공담에 박수를 치고, 잘 차려진 음식을 배불리 먹으며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리던 그 시간은 분명 전형적인 '장조(Major)'의 시간이다. 하지만 모임이 끝나고 홀로 지하철에 올라 창문에 내 얼굴이 비치는 순간, 풍선처럼 부풀었던 감정은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고 무표정한 얼굴. 배는 부르지만 마음 한구석은 오히려 텅 빈 것 같은 그 묘한 씁쓸함은, 화려한 화음 뒤에 숨어 있던 내 삶의 블루 노트가 흐르는 순간이다.


남들의 속도에 맞추느라, 혹은 내 처지를 감추느라 억지로 끌어올렸던 음정들이 제 자리인 '푸른 빛'으로 툭 떨어질 때 느껴지는 그 서늘한 기운. 우리는 이 감정을 지워야 할 우울함으로 여긴다. 하지만, 사실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나와 대면하는 시간이 아닐까. 거품 같은 웃음이 빠진 자리에 남은 그 푸른 슬픔이, 비로소 내 삶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방에서 흘러나오던 이 푸른 선율은, 타인의 소리와 만날 때 비로소 입체적인 화성이 된다.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상대의 밝은 면뿐만 아니라, 그가 깊숙이 담아둔 푸른 그늘까지도 내 삶 속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흔히 타인의 슬픔을 마주하면 성급한 처방전부터 꺼내 들곤 한다. "금방 괜찮아질 거야"라거나 "힘내"라는 말로 상대의 블루 노트를 서둘러 장조의 음정으로 끌어올리려 애쓴다. 하지만 재즈가 일부러 비껴간 음을 만들어 매력적인 화음을 쌓듯,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상대의 블루노트를 성급하게 교정하지 않는 인내심일 것이다.


상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거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을 때, 그 비껴간 지점을 가만히 응시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너의 그 푸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아"라고 눈을 맞춰주는 공명. 서로의 블루 노트를 지우려 하지 않고 그 불안한 화성 속에 함께 머물러줄 때, 두 사람의 관계는 하나의 깊은 '블루스'가 된다.


재즈 연주자들은 블루 노트를 연주할 때 음을 반듯하게 내지 않는다. 건반을 누르거나 줄을 튕긴 뒤 그 음을 살짝 구부리거나 미끄러뜨린다. 고통을 정면으로 돌파하기보다 그 고통의 주변에서 소리의 질감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슬픔이나 상처가 닥쳤을 때도 그것을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로 여기지 않고, 그 감정이 내 안에서 충분히 머물며 나만의 색깔을 낼 수 있도록 시간을 주어는 것이 필요하다. 슬픔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 영혼의 화성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필요한 불협화음'이기 때문이다.


사실 눈부신 예술은 대개 이 '푸른빛'에서 탄생했다. 억압받던 이들이 목화밭에서 부르던 노동요가 재즈의 뿌리가 되었듯, 우리 삶의 가장 빛나는 성취 역시 가장 어두웠던 터널을 통과할 때 만들어진다. 블루 노트를 연주할 때 곡의 긴장감이 극대화되듯, 우리 인생도 시련과 우울의 지점을 지날 때 비로소 남들과는 다른 독창적인 서사를 갖게 된다. 매끄러운 장조의 삶에는 감동이 없지만, 블루 노트가 섞인 삶에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깊은 힘이 있다.


마음속에 푸른 그림자가 짙게 깔렸다면 억지로 걷어내려 애쓰지 말자. 그런 날은 인생이라는 긴 곡에서 가장 세련되고 아름다운 구간을 연주하는 중이라 믿자. 그 비껴간 음들이 모여 결국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톤(Tone)을 만들어낼 것이다. 재즈가 아름다운 건 찬란한 기쁨 때문이 아니라, 그 기쁨 밑바닥에 흐르는 짙푸른 슬픔을 있는 그대로 껴안았기 때문이다. (수필/음악)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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