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BRATO

흔들림을 통해 깊어지는 소리

by 세인트

8장. VIBRATO - 흔들리며 깊어지는 소리


연주자가 하나의 음을 길게 끌 때 손가락이나 입술을 미세하게 떨거나 호흡의 압력을 조절해 음의 파동을 만들어낸다. 소리를 위아래로 짧게 흔드는 기술, 바로 ‘비브라토(Vibrato)’다. 비브라토가 전혀 없는 소리는 정교하고 깨끗하지만 어딘가 차갑고 건조하다. 반면 적절한 떨림이 실린 소리는 공기 중으로 번져나가며 듣는 이의 마음도 떨리게 만든다. 재즈에서 비브라토는 단순히 음을 예쁘게 꾸미는 장식뿐만이 아니라 연주자의 감정이 실린 숨결이자, 소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인간적인 흔들림이다.


삶에서 흔들리는 것은 불안이나 미숙함으로 여긴다. 마치 개선장군처럼 확신에 찬 목소리, 흔들림 없는 결정, 한치도 오차가 없는 일상이 성공한 사람의 모습인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마음이 흔들리거나 선택 앞에서 주춤거릴 때면 스스로를 자책한다. "왜 나는 이렇게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릴까?"라며. 하지만 재즈 연주자의 시선으로 보면, 흔들리지 않는 삶은 비브라토가 빠진 일직선의 소리다. 명확하지만 어딘가 기계적이고 무미건조하다.


인생의 깊이는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통과해 온 수많은 흔들림 속에서 만들어진다. 삶의 비브라토는 예고도 없고 또 잦다. 며칠 밤을 새워 완벽하게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마이크를 잡았을 때, 아무리 억눌러도 떨리던 손끝. 짝사랑하는 그에게 고백을 하며 마른침을 삼키던 목소리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이런 떨림을 감추어야 할 결함이나 약점으로 생각한다. 침착하거나 대범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억지로 떨림을 억누르려 애쓴다.


하지만 그 떨림은 내가 지금 이 일을 , 상대를, 얼마나 소중하게 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아무런 감흥이 없는 대상 앞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몸의 생리다. 떨리고 있다는 건 그만큼 내가 이 순간에 온 마음을 다해 몰입하고 있다는 뜻이며, 내 안의 에너지가 넘쳐흘러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다는 신호다. 탁자 위에 놓인 커피 잔을 들었을 때 달그락거리던 소리, 시선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몰라 흔들리던 눈동자, 울컥함을 참느라 자꾸만 잦아드는 말끝. 이런 삶의 비브라토들은 결코 부끄러운 실수가 아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인간미를 증명하고, 그것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울림을 일으킨다.


관계 속에서도 비브라토는 제법 큰 힘을 발휘한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깊은 속내를 나눌 때, 논리 정연한 정답만을 매끄럽게 늘어놓는 사람에게서는 왠지 모를 벽이 느껴진다. 반면, 자신의 약점까지 꺼내 놓으며 입술이 떨리거나, 감정이 차올라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호흡을 가다듬는 사람에게 우리는 무장해제될 수밖에 없다. 매끈하게 뻗은 음보다, 가늘게 떨리며 공기를 가르는 음이 더 멀리 퍼져나간다. 학창 시절 미술시간 선긋기를 할 때, 손을 살짝 떨어가며 그리는 직선이 끝까지 더 곧게 그려진다는 것도 배웠다.


나의 불완전함과 흔들림을 솔직하게 내비칠 때 타인과의 진정한 공명이 시작된다. 관계의 깊이는 서로의 흔들림을 외면하지 않고 그 파동 속에 함께 머물러줄 때 비로소 깊어지는 법이다. 상대의 떨림을 알아채고 나 또한 내 안의 떨림을 감추지 않을 때, 두 사람의 소리는 비로소 하나의 풍성한 화음이 되어 공간을 채운다.


사실 비브라토는 음의 중심을 완전히 잃은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음의 정중앙을 기준으로 위아래를 정교하게 오가는 조절이다. 인생의 흔들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완전히 중심을 잃고 무너져 내리는 것과 비브라토처럼 유연하게 흔들리는 것은 다르다. 내 삶의 중심축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가오는 감정과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마음을 떨 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고집스럽게 굳어 있는 마음보다 부드럽게 떨리는 마음이 시련 앞에서 훨씬 더 질긴 생명력을 갖는다. 굳어버린 나무는 강풍에 꺾이지만, 흔들리는 가지는 바람을 타고 제 박자를 찾는다.


재즈 거장들의 연주를 들어보면 저마다의 비브라토가 다르다. 어떤 연주자는 폭이 넓고 느긋하게 흔드는가 하면, 어떤 연주자는 아주 짧고 날카롭게 소리를 떤다. 그 차이가 바로 연주자의 개성이 되고 고유한 톤(Tone)이 된다. 내가 겪는 불안의 농도와 고민의 흔적들은 나만의 독특한 삶의 모습을 만든다. 남들과 똑같은 정답을 내놓지 못한다고 해서, 혹은 남들보다 더 많이 흔들린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는 없다. 그 흔들림의 폭과 속도가 바로 나이며 나만이 낼 수 있는 울림이기 때문이다.


때로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이 밀려온다면 그것을 억지로 멈추려 하지 말자. 대신 그 떨림을 가만히 응시해 보자. 어쩌면 지금 인생이라는 악기를 통해 가장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는 중일지도 모른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박제된 소리에 불과하지만, 흔들리는 소리는 살아있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온기를 담은 소리다. 그 미세한 비브라토가 나의 평범한 일상을,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깊고 풍성한 재즈 선율로 채워줄 것이다.


인생의 진짜 감동은 흔들림 없는 완벽함이 아니라, 그 떨림을 기꺼이 받아들여 자신만의 울림으로 바꾸어 내는 연주자의 모습에 숨어 있다. 그러니 마음껏 흔들려도 좋겠다. 나의 소리는 그 흔들림 덕분에 깊어지고 있는 중일 테니까.(수필/음악)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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