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 좀 많기는 했다. 의사가 다른 지역으로 가서 개업을 한대서 , 그럼 약을 좀 넉넉히 달랬더니 무려 3개월치를 처방한 것이다. 증상이 좀 나은 것 같고, 금세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을병도 아니고, 나처럼 성질머리 까탈스러운 사람들에게 흔한 과민성대장. 매일 먹지 않아도 되니 이따금 상태가 많이 안 좋을 때 한 번씩 먹으래서 서랍에 두고 어쩌다 한 번씩 먹으니 약이 좀체 줄지 않는다.
요 며칠 상태가 좋지 않아 자기 전 약을 먹어야겠다 싶어 딸애에게 꺼내놓으라 전화를 했다. 귀가가 늦어 약 찾는다고 뽀시락 거리면 잠귀 밝은 아내가 깰까 봐. 한참 후 딸애에게 전화가 왔다. 아니 이것이 애비에게 감히 따지듯 묻는다."아빠, 이거 무슨 약이야?"도 아니고 "아빠 이거 무슨 약이야!!" 나는 얘가 왜 이러나, 뭐 잘 못 먹었나? 하면서도,
"그거? 장이 안 좋을 때 먹는 거"
"그런데 왜 약이 이렇게 많아?"
"두고두고 먹어야 해서"
"그동안 얼마나 먹었는데?"
"약 탄 건 오래지만, 가끔 상태 안 좋을 때만 먹어"
"그냥 장이 안 좋아서 먹는 거야?"
"그래, 아빠 과민성대장이잖어?"
그러고 전화를 끊었다.
얘가 또 오버했구먼, 애비가 무슨 큰 병이라도 걸려 숨긴다고 생각하나 보다 하고 웃었다. 집에 가니 딸 애가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기다리고 있다.
"아빠, 그거 과민성대장 약 맞는 거지? 내가 그거 하나하나 꺼내 챗지피티에게 물어보니 위장약 안정제 같은 여러 가지가 나와서, 전에 아빠가 부신에 큰 혹이 있댔다가 다시 오진이라던 게, 사실은 오진이 아니고 아빠가 뭔가 숨기는 게 아닌가 했지" 하고는 킥킥 웃는다.
순간, 렌즈 대신 집에서만 쓰는 뱅글뱅글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는 우리 '과년한 여식'께서, 아침에 유치원 갈 때마다 어항의 거북이, 냉장고, 인형 등 집안의 모든 것에게 빠이빠이 하던 그때의 아이로 보여 얼른 뽀뽀 쪽 해주고 자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