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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 여행

by 박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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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을 ‘악마 구름’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7일 뉴스를 보고 알았다. 5월 1일 충남 서산휴게소에서 본 구름이 그랬다. 정확한 명칭은 ‘거친물결구름’. 찬 공기와 따뜻한 공기가 우왕좌왕 충돌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란다.


이렇게 험악한 형상의 구름은 처음 본다. 위축성 위염의 위장 같기도 하고 몇 만 년 된 화산 퇴적층 같기도 하다. 그날엔 이름과 걸맞지 않게 폭우가 아닌 소나기가 틈나는 대로 내렸다. 나와 두 동생, 삼형제가 고창 가는 길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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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에 들어섰다. 성벽 위가 둘레길이었다. 동쪽 월곡산 등성이 따라 구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바람 따라 흘러가니 조각조각의 안개가 되었다. 안개는 구름과 대지가 포옹하고 있는 흔적. 그래서인지 하트 모양의 안개도 보였다.


월곡산에서 보면 이쪽 읍성이 안개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읍성 내 저지대 듬성듬성한 소나무 군락과 빼곡한 맹종죽(관상용 대나무) 군락이 보이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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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을 지닌 ‘선운(禪雲)’의 선운사를 찾았다. 선운사보다는 선운천 따라 템플스테이 장소까지 걷는 길이 좋았다. 비를 머금은 신록, 중간 초록, 진초록의 단풍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사방으로 어슷하게 뻗어 있는 단풍잎들이 잎그림자 그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정자에서 휴식을 취했다. 낱개의 빗방울들이 선운천 위로 떨어지며 동심원을 자아냈다. 동심원의 느린 파동이 단풍나무 물그림자 형상을 흐트러뜨린다. 캔버스에 세밀히 그려 놓은 연필 자국을 검지손가락으로 쓱쓱 매만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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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일 둘째 날 대기는 맑음이었다. 습지보호에 관한 국제협약, ‘람사르 협약’에 가입된 운곡습지를 찾았다. ‘습지’란 “물기가 축축한 땅”, “물을 담고 있는 땅”을 말하는데 운곡습지 한가운데 운곡저수지가 그 역할을 한다.


입구를 지나 저수지 건너편으로 보이는 숲엔 활엽수와 침엽수가 골고루 섞여 있었다. 카메라 줌으로 보면 옅고 짙은 녹색의 그 모양새가 촘촘한 물방울무늬 옷감 같다.


때마침 숲 위로 항공기가 비행운(비행기구름)을 그리며 하강하고 있었다. 비행운이 보인다는 것은 저곳이 영하 몇 십 도의 고도가 아주 높은 곳임을 뜻한다. 대지를 보호하는 습지와 대기를 해치는(온난화) 비행운이 외형상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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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리밭은 수평선 있는 바다를 닮았다. 그래서 파도도 있다. 바다 파도의 포말이 하얗듯, 바람이 불면 청보리밭 상단도 하얀 물결의 파도가 되어 차례차례 밀려온다. 이제 고창 청보리밭 축제도 끝물이어서 노르스름한 색 기운도 같이 보인다.


문득 ‘청(푸를 청, 靑)’에 대한 의문점이 들었다. 청보리는 분명 녹색인데, ‘녹보리’라 하지 않고 ‘청보리’라고 부른다. 사전에 ‘청색’은 “맑은 가을 하늘과 같이 밝고 선명한 푸른색”이라고 풀이돼 있다. 이번엔 ‘푸르다’의 뜻풀이를 찾아보았다. 아! 두 번째 뜻으로 “곡식이나 열매 따위가 아직 덜 익은 상태에 있다”라고 나와 있네. 그래서 ‘푸른 과일’, ‘푸른 보리(청보리)’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나만 모르고 있었나……


음력 4월 초승달이 뜨는 날, 우리 삼형제는 고창에서 삼색 여행을 하고 왔다. 구름, 습지, 청보리라는 자연 속 여행이었다. 문학기행처럼 부러 지식을 동반하지 않고 행선지도 현장에서 정한, 스치듯 다녀온 여행이었다. 이 글이 늦게 쓰인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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