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맞춤

by 박태신

안성에는 문학관이 두 곳 있다. 조병화문학관과 박두진문학관. 내가 속한 문학기행반이 이 두 곳을 들렀다. 나에겐 박두진문학관이 공간적으로 더 마음에 와 닿았다.


두 곳 문학관 분위기가 시인의 품성과 닮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앞서 들른 조병화문학관이 자주 담소가 오가는 사랑채 같다면 박두진 문학관은 곧은 정기가 깃든 수도원 같았다. 박두진 시인의 얼굴 표정을 봐도 그런 느낌이 든다. 수도사가 기도하듯 시를 썼다고 할까. 어린 시절의 얼굴에도 고집스러운 결기가 보인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어 알았지만, 누나의 간곡한 편지가 없었다면 열여덟 살 두진의 고집이 모나게 발휘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두진문학관에서 첫 번째로 내 눈을 잡아당긴 것은 단아한 창 풍경이었다. 옥상도 좋지만 시인이 살아 계셨다면 자주 이곳에서 창밖으로 좋아하는 안성의 산과 해를 바라보셨을 것이다.


박두진 시인은 6.25 때 종군기자 비슷한 종군문인으로 일하면서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먹고살기 위해서. 그런데 산문만이 지닌 매력을 알게 되고 이후 400여 편의 산문을 썼다. 산문의 매력을 알고 평생 쓸 생각을 지닌 나에게 시인이 섬광 같은 기운을 불어준 사연이다.


올곧게 자연을 노래한 박두진 시인의 자연은 인간의 이성과 이상을 담은 자연, 신으로 귀결되는 자연이었다. 수석(壽石)을 자연의 극치로, 신의 메시지로 들을 정도였으니까. 내겐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고귀함이다. 나는 자연 그대로가 좋다. 그저 자연이 풍겨내는 아름다움을 즐긴다. 자연 속에서 나를 돌아보고 되찾고, 자연에게서 얻은 영감으로 글을 쓴다. 대가 앞에서 소인배일지라도 어쩔 수 없다.



어느 문학관을 가든 유품 중에 내 호기심을 제일 동하게 하는 것은 원고지와 교정지다. 글자들의 놀이마당이고, 이미 쓴 것을 마음껏 고치는 자유가 이곳에 있다. 다른 이의 원고 교정을 많이 해봤지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내 글의 교정지를 대할 때는 눈치 볼 일이 없어 사정없이 망치와 정을 갖다 댄다. 내가 유일하게 만용(!)을 부리는 때다. 내 이야기를 듣고 시인이 코웃음 치실까 저어한다.


집필실의 앉은뱅이책상 풍경이 소박하고 단아하다. 우편물이나 불만스러운 원고지 등이 그러모아졌을 항아리가 정갈한 책상 분위기를 돕고 있다. 항아리가 포만해지면 솎아내곤 하셨을 게다.


당나라 시인 유우석이 쓴 ‘누실명’(누추한 집에서 마음에 새기는 교훈)의 내용을 직접 붓으로 쓴 초서체 병풍이다. “……이 누추한 집에는 오직 나의 향기로운 덕이 있을 뿐, 이끼는 섬돌에 올라 새파랗고 풀빛은 주렴에 들어 푸르도다.……”


‘상선여수’(上善如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말없이 고요하게 흐르는 물의 자세를 배워 모나지 않게 살아야 한다고 하셨단다.


옥상 마당이 있었다. 여기서는 전망대라고 부른다. 누구는 저 터에 층 하나 더 지으면 내부 공간을 넓힐 수 있었을 텐데 생각하기도 하겠지만, 동행들 중에 이 넓은 잔디 마당이 우리 마음을 시원하게 터뜨려 주었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 같다. 눕고 엎드리고 뒹굴며 사진을 찍었다. 우리 마음에는 멍석을 깔아주면 발휘할 수 있는데 현실은 그럴 기회가 드물어 발휘하지 못하는 아이다움과 자유인의 끼가 눌려 있다.


문학관 밖은 금계국 세상이었다. 꽃이 황색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찾아보니 ‘닭 계’(鷄) 자다. 노랑 닭 꽃. 다들 노랑이 도드라진 풍취에 빠져 헤어날 줄 몰랐다.


야외 정원에 두 시인 시비가 있었다. 운 좋게 내가 박두진 시인의 ‘해’를 낭독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모임 선배가 박두진 시인의 ‘해’를 해설해 주셨다. 시의 내용과 선배의 설명처럼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안심하고 함께 머무는 세상이 열리기를 소망했다.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애띠고 고운날을 누려보”기에 안성은 안성맞춤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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