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길 퀼트

by 박태신

11월 첫 주말 남산 나들이 전날의 새벽안개다. 퇴근 시간 물류센터 마당에 깔려 있었다. 구름을 좋아하는 나는 안개도 신기하게 여겨 그 속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고 싶을 정도다. 셔틀버스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고속도로를 점령한 안개를 바라보며 운전기사 아저씨와 안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연스레 나들이 날은 여행 떠나기 좋은 포근하고 쾌청한 가을 하늘을 선택했다. 전날 새벽안개가 맑은 날씨의 전조였을 것이다. 그런데 안개는 “지표면 가까이에 아주 작은 물방울들이 김처럼 뿌옇게 떠 있는 현상”이므로 사실 구름과 다를 바 없다. 하늘이나 산 위에 이런 물방울들이 뭉친 모습이 멀리서 보면 구름이고, 그 속에서 보면 안개이기 때문이다.


김소월 시인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한 이번 문학기행 모임은 안갯속 물방울처럼 남산 위를 맴돌고 맴돈 시간들이었다. 우리 말고 수많은 ‘물방울’들이 우리 주위를 지나쳤다. 그런데 우리는 ‘이야기’라는 응결핵이 있어 둘 또는 넷 또는 여덟 이렇게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수다스러운 물방울이었다.

무대 울렁증을 없애기 위해 시낭송을 시작해 최근 성공적인 발표회를 가졌다는 늦깎이 대학원생 지인 이야기. 정년 퇴임한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시를 배우고 암송의 즐거움을 누리다 오래전 개설한 시낭송 유튜브의 운영 소식을 전해준 시인 지인 이야기. 저작권과 상관없는 오래전 일본문학 작품을 전자 출판하는 일로 번역의 목마름을 해갈하고 있는 일본어 번역가 지인 이야기. 깜찍하게 생긴 텀블러로 물을 마시면서 자기의 모든 것이 ‘미니어처’라고 표현한, 체구가 자그마한 식물 애호가 지인 이야기. 비대면이든 대면이든 수업에 열중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로 딴짓하는 20대 외국인 학생들 때문에 속상하다는 한국어 강사 지인 이야기. 건강관리를 위해 그 좋아하는 등산을 쉬고 국궁을 취미로 삼고 있다고 하면서 국궁과 양궁의 차이를 소상하게 알려준 동갑내기 지인 이야기. 도서관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 진행하고 있는 우리 모임의 회장 이야기.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이렇게 우리 팔인(八人)은 다양한 색을 지닌 철새 팔색조처럼 태생지에서 산란지까지 도로와 정식 등산로 또는 샛길로도 빠져 들기도 하면서 남산을 완등했다. 태생지는 한국현대문학관이었고 산란지는 소월 시비였다. 한국현대문학관은 기증품으로 이루어진, 문학 보급의 산실인 곳이어서 태생지로, 김소월이 죽은 뒤 시비가 만들어졌으니 소월 시비 자리는 여행의 종착지인 산란지로 비유할 수 있겠다.



하늘 안개인 구름은 ‘선택’이라는 행위에서 무장 해제된 존재다. 기압, 바람, 수분 양에 따라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양새를 갖추고 움직이는 존재다. 그래서 자유롭고 멋진 모습을 뽐낼 수 있기도 하다. 이날엔 끈끈하게 뭉쳐 비를 뿌리지 않아도(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고, 굳이 멀어지거나 흩어지지 않고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며 흘러가면 되는 구름 조각들을 보았다. 이번 모임에 나를 포함해 양띠가 네 명이나 모였으니 무리 수 적은 양떼구름 같다고 우겨도 되겠지. 이날 남산에서의 우리 발걸음도 구름의 속성을 닮아 날아갈 듯 자유로웠다.

남산서울타워는 이번 기행에서 지구가 자전을 해도 전혀 위치가 변해 보이지 않는 북극성과 같은 존재였다. 우리가 찍은 사진 속엔 으레 남산서울타워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래전 고대인과 중세인들이 북극성을 지표 삼아 육지 여행과 항해를 했던 것처럼 우리도 남산을 둘러싼 산책로를 남산서울타워를 북극성 삼아 방향을 잡고 틀고 했다.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의 시 ‘산유화’ 전문)


걷다가 힘들어 앉아 나눠 먹은 새큼달큼한 귤은 철새들이 중간 경유지에 머물면서 목을 축이고 배를 채우는 갯벌 먹이와 같았다. 시인의 삶을 기리고 묵념하는 자리에서도 귤은 긴요한 역할을 했다.


모임 회장의 길잡이 역할 덕분에 남산 나들이를 잘 끝냈다. 각자 입에서 가을볕에 잘 말린 고추 같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여덟 사람 각자가 길 위에서, 각자 사는 삶의 방식에 따라 토로한 이야기들로 울긋불긋 남산의 단풍잎들 닳은 퀼트 작품을 만들어낸 나들이였다.


입동은 지난 지 한참이고 이제 11월 말이자 겨울 초입의 나날이다. 살다가 힘들면 우리가 만든 ‘남산길 퀼트’를 꺼내 몸에 감싸면서 스스로를 따뜻하게 위로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동행한 이들에게 마무리 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