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공휴일이라 그런지 어젠 봄 산책 나온 이들이 여느 날보다 많았다. 봄옷으로 구색을 맞추며 뽐을 내는 젊은이들이 자주 보였다. 봄은 봄이구나 하는 고백 속에는 긍정의 요소가 들어 있다. 가파른 고개를 막 넘어왔을 때처럼, 추운 겨울을 잘 보냈다고 하는 안도감과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위력이 그렇다. 아직 나를 비롯해 많은 산보객들이 겨울 외투를 입고 있긴 했지만 이내 지퍼를 내리고 봄 햇살과 봄기운을 외투 안으로 받아들였다. 이젠 추위로 움츠려들 염려가 없어 너그러워진 몸짓이다. 봄이 부리는 요술이다.
아! 그 잠바 지퍼를 내리듯 경춘선 철길 산책로에 잔뜩 심어진 산수유나무의 산수유도 꽃봉오리를 살짝 벌리고 노란 속내를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자잘한 꽃송이들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아직 온도와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그 산수유가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법정 스님이 그러셨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봄을 이루는 것”이라고(<일기일회> 중). ‘수동’을 ‘능동’으로 바꾼 표현이다. 시간이 되면 저절로 오는 수동의 봄이 아니라, 안간힘을 써 꽃을 피워 봄이 오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경춘선 철길 산책로 한쪽, 여름철 능소화나무가 끈덕지게 덩굴을 이루며 꽃을 피워대던 비스듬한 담벼락에 서양화가들의 그림 복사본이 큼지막한 액자에 넣어져 걸려 있다. 그중 한 그림에 주목했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의 ‘커피를 마시는 소녀 농부’다. 소녀의 옷차림과 창밖의 녹색 풍경이 봄날을 연상시킨다. 화가가 손 모양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했는데, 농부 손이라서 그런지 참 크다. 그런데 이 그림에 더 주목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다.
내가 속한 네이버 밴드의 동료 회원이 봄날 봄동을 절이고 나서, 주방 의자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시집을 읽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시를 읽었기 때문이다. 봄이어서 차분해진 마음에 더 잘 들렸을 일상의 소리들도 담아놓았다. 농부인 소녀와 주부인 동료가 커피 한 잔으로 일상 속에 휴식을 넣는 모습이 매치를 이루었다.
잘 몰라 사전을 찾아보니 봄동은 “노지에서 겨울을 보내어, 속이 들지 못한 배추”라고 소개하고 있다. 겨울 배추인 셈이다. ‘노지’도 찾아보니 “지붕 따위로 덮거나 가리지 않은 땅”이라고 나와 있다. 한자로 ‘露地’이니 이슬이 맺히는 땅이다. 그러니까 봄동은 ‘노상’ 노상(露霜 : 이슬과 서리) 속에서 자란 배추라 하겠다. 쓴맛을 본 배추라고 할까.
이 글을 쓰다 나도 따라 커피 한 잔 했다. 에스프레소 같은 아메리카노 스틱 커피. 자주 물을 적게 타 짝퉁이긴 해도 에스프레소의 쓴맛을 맛보곤 한다. 이날엔 입맛이 둔해진 것인지 물을 많이 탄 것인지 에스프레소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다음엔 꼭 절수를 해야지.
녹슨 철길을 따라 산책로를 계속 걸었다. 부리로 껍질을 살짝 깬 햇병아리 같은 산수유 꽃 말고 봄을 느끼게 해주는 나무는 아무리 살펴봐도 없다. 꽃이 없는 장미나무와 찔레장미의 가시가 따갑게 눈을 찌른다. 지구가 태양에게서 더 많은 햇살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지구 온난화는 그렇다 치고 지구는 봄이라는 옷을 입기 위해 태양 주위를 도는 여정을 계속할 것이다.
헐벗은 계수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이름에 ‘계수나무 계’ 자가 든 지인이 있다. 계수나무 하면 달이 생각나기도 하겠지만, 이 사실을 알고 나서 괜찮은 한자어로 이름을 얻었구나 생각했더랬다. 실제로 한자사전을 찾아보니 계수나무는 상서로움을 지닌 나무라고 소개하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어 본인도 산책하다 이 나무 이름 푯말을 보았을 텐데 어떤 느낌이었을까 궁금해진다. 다음에 꼭 물어봐야지.
3월 오후 5시 반 무렵의 햇살은 호수로 잔디에 물을 줄 때 물줄기가 끊임없이 나오는 모습과 비슷한, 길고 제법 진한 빛줄기다. 역광으로 찍어야 제멋이 살아나는 피사체다.
마트와 시장에만 들르려다, 마치 예전 경춘선 열차가 올라타라고 유혹한 마냥 그 유혹에 넘어가 긴 산책로를 거닐었다. 그렇게 봄을 보고 돌아왔다.
추신.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봄동과 커피를 소재로 시를 쓴 동료 덕분에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