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월기

by 박태신

당 떨어지는 느낌이 세게 들었다. 그저께 물류센터에서 새벽에 퇴근했을 때다. 편의점에서 사 온 초코바와 초코칩 과자로 서둘러 허기를 채우니 그 느낌이 사라졌다. 한두 해전부터 단맛의 간식을 먹곤 하지만 이런 경험은 드물다. 일이 고되긴 고되다.

이십여 일 전 새로운 물류센터에서 일을 시작했다. 전에 다닌 물류센터와 같은 회사 소속이지만 일용직으로 일도 많이 하고 내 적성에 맞는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던지라 고민 끝에 옮겼다. 결과는 대만족. 정말 열심히 계약직 사원처럼 꾸준히 다녔고, 이젠 관리자들이 인정을 해주고 내가 원하는 일 분야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번역이라는 본업이 있기에 미래의 어느 때를 위해 일용직으로만 일하고 있어 매일 출근 신청을 해야 하는데 거의 ‘부름’을 받는다. 성실하고 요령을 늦게야 피울 줄 아는 성향이 한몫을 했다. 그렇지만 몸은 시원찮다. ‘반투명 반창고’라 불리는 밴드가 남아나질 않는다. 그저께 면봉을 새로 사 왔다. 허리는 마르고 큰 키의 내 몸을 견뎌내느라 통증을 달고 산다.


오후조라 오후 5시쯤 출근하는 이 일의 장점은 우선 출퇴근 전쟁이 없다는 것. 집에서 15분쯤 걸어가 셔틀버스를 타고 가는데 신규 물류센터라 40인승 버스 안에는 아직 열 명이 채 탑승하지 않은 상황이고, 그래서 요즘처럼 거리두기가 미덕인 시대엔 말이 셔틀버스지 자가용이나 다름없다. 휴식시간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사 아저씨는 사원들이 좀 더 휴식을 잘 취하도록 차 안의 조명을 제어해준다.


게다가 해가 지기 시작하는 3월 출근길의 하늘은 가끔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 바람과 수분이 붓과 물감이 되어 하늘이라는 캔버스에 다양한 그림을 그려놓곤 한다. 인상파 화가가 좋아하는 햇빛이 채색에 한몫을 한다. 아주 맑거나 구름이 군데군데 끼거나 노을 색이 바탕색이 되는 날의 하늘은 수채화가 된다. 반면 먹구름이 잔뜩 끼거나 안개가 깔리고 비까지 내리면 물감을 덧칠하고 덧칠한 유화가 된다.


새벽 5시 무렵 셔틀버스에 내려 집으로 가는 퇴근길의 하늘은 또한 어떠한가. 가로등 덕분이지만 검은색 옷감에 노랗게 수놓인 산수유를 볼 수도 있고, 집에 도착해 샤워하고 난 뒤엔 창밖으로 연극 무대를 아주 서서히 밝히는 조명처럼 날이 밝아오는 모습을, 이내 날이 밝아 구름이 선착장 저 멀리 바다 위로 느리게 지나가는 듯한 모습을 보기도 한다. 하루 중 내가 모든 시름을 접고 와인 한 잔 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요즘 나에게 집중하기 위해 인터넷 뉴스는 삼가곤 한다. 음악을 트는 경우도 드물어서 새벽의 뉘앙스답게 침묵과 정적의 시간이 내 주위를 점령한다. 와인이 목젖을 적신 뒤 넘어가는 소리, 안주 씹는 소리, 펜으로 메모 끼적이는 소리, 창밖으로 참새 지저귀는 소리, 가끔 까악거리는 까마귀 소리가 간이역에서 탑승, 하차하는 승객 수만큼만 들리는 시간.


그러나 날이 완전히 밝으면 아무리 건강한 햇빛이라도 피하고 싶은 대상이 된다. 잠을 잘 땐 창 가리개를 내리고 암막커튼도 펼친다. 자연의 순리에 거슬러 일을 하는 이들의 부끄러운 저항의 모습.


그렇긴 하지만 잠을 자는 이들의 신체 속은 정지하는 법이 없어 새로운 날을 위한 메커니즘이 이루어지고 있듯, 고객들이 주문한 상품을 받아 사용하기까지엔 나와 같은 ‘밤의 전사들’의 노고가 선행된다. 새벽 퇴근길 빌라 계단을 올라갈 때 보이는 호별 문들 앞 택배 물건들은 나와 같은 이들의 밤의 생활이 있어 존재할 수 있다. 바닥에 놓인 택배 상품을 보면 고객의 주문과 동시에 이어지는 전 과정 모습이 내 눈에 선하다. 마치 입으로 섭취한 음식(주문 상품)의 영양소가 피를 타고 혈관을 통해 온몸(전국)에 전달(배송)되는 것과 비슷하다. 이 일을 하기 전엔 몰랐던 세상.


3월은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무렵인 간절기다. 양쪽 계절의 시간 스펙트럼을 지닌 시기. 4월 첫날인 오늘을 비롯한 앞뒤 며칠은 ‘간월기(間月氣)’라 할 수 있겠다. 특히 나에겐 이 기간이 더욱 피부에 와닿는데, 어제 3월 31일에 출근해 오늘 4월 1일에 퇴근했기 때문이다. 낮과 밤의 온도 차가 14도 정도 나는 꽃샘추위로 마지막 겨울 본색을 드러내면서. 사실 나는 매일 ‘간일기(間日氣)’도 경험한다. 날짜가 바뀌는 정점에 나는 건물 안에서 줄기차게 발품을 팔기 때문이다. 물류센터에서 밤 11시와 다음날 1시 사이는 가장 바쁜 시간 때다.


창고에서 상품을 골라 모아(집품) 포장하고 트럭에 싣는 과정은 신문사의 종이신문 기사 원고 최종 마감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마지막 편집 기사가 넘어간 후 얼마 안 있어 윤전기가 돌아가는 과정은 배송 상품이 트럭에 실려 출발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종이신문이 한창 필요하던 시절 나는 방송통신대 학보사 기자 생활을 한 적이 있다. 매주 수요일마다 학보사와 계약을 맺은 신문사로 출근해 최종 기사 편집을 했는데, 원고를 넘기고 한두 시간 뒤 윤전기에서 막 찍어 나온 따끈한 신문을 검토하고 뒤풀이를 갖곤 했다. 문제가 없다면 신문은 당일 전국으로 배송된다.


3월은 봄을 보기 시작한 달이었다. 이제 4월은 봄을 그리는 달이다. 겨울 어느 날 마트에서 바나나 초코파이가 선을 보여 자주 사 먹었다. 그런데 올봄을 앞두고 분홍색 벚꽃 같은 딸기가 주역이 된 ‘봄 초코파이’가 등장했다. 몇십 년간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은 ‘우직한’ 오리지널 초코파이가, 포장박스 뒷면에 12색 색연필로 그리면 좋을 빈 공간을 마련해놓은 ‘영특한’ 초코파이로 변신할 줄을 알게 된 것이다. ‘우직한’ 초코파이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영특한’(내겐 바나나 초코파이) 초코파이는 자주 사 가지고 들어온다.


퇴근길 어두운 새벽에 본 조팝나무의 막 자란 잎들이 앙증맞기 그지없다. 간월기를 지나면 저 잎들은 꽃과 더불어 제 나무를 온통 뒤덮기 시작할 것이다. 4월 첫날 오늘의 하늘은 구름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가늘고 길게 수놓인 맑은 수채화다. 4월, 나는 어떤 봄을 그릴까 자주 생각해야겠다. 여러분도 어떤 모습이든 봄을 그려보길 소망한다. 이번 글은 단숨에 나온 것이 아니라 자주 생각하고 끼적이다 완성된 것이다. 새벽이 아침이 된 지금, 글을 올리고 나서 바나나 초코파이 하나 먹고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