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나 예쁘죠?”
지난주 일요일 불문학과 후배에게서 온 카톡 문자다. 황홀하다고 할까 정말 멋진 화병 사진과 함께. 연노랑의 장미, 라넌큘러스에 흰 꽃이 자잘하게 피어나기 시작한 냉이초가 색깔별로 좌우를 향하며 백색의 벽지 앞에서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계량컵이 화병이 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사실 이 꽃들은 내가 선물한 것이다. 그렇지만 꽃이 재탄생했다. 이보다 이틀 전 나는 반년 만에 이 후배 집을 방문했다. 10여 년부터 알고 지낸 후배 내외이다. 으레 저녁 만찬이 마련되고 밤늦게까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소풍 같은 시간을, 후배의 권유로 또 한 번 마련했다. 코로나로 일찌감치 세 식구가 작은 몸살을 앓았지만 집안에서도 잘 즐기며 사는 가족이다.
후배네 집에 방문하기 전에 이미 준비한 와인 한 병과 더불어 무슨 선물을 사 갈까 고민하다 꽃다발이 생각났다. 집 근처 마음에 드는 꽃집이 있어 지나가다 슬쩍 안을 기웃거리곤 했는데 그곳으로 성큼 들어갔다.
후배 내외 초등학교 3학년 딸 이름은 '봄' 외자이다. 명함에 ‘국가공인화훼장식기사’라고 직함이 적혀 있는 주인장에게 이 후배 가족을 언급하면서 알맞게 꽃다발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노란색과 흰색의 봄꽃들로 멋지게 꽃다발을 만들어 주었다. 장미, 프리지어, 라넌큘러스, 조팝나무 꽃, 냉이초가 모였다. 바깥 공원에서 슬쩍 해온 조팝나무 꽃 아니냐고 농을 쳤더니 시장에서 산 비싼 꽃이라는 답변이 날아왔다.
잠시 '꽃을 든 남자'가 돼 버스를 탔는데 자주 나(사실은 내 꽃다발)에게 시선이 꽂히는 기분 좋은 경험을 했다. 물론 후배도, 봄이도 좋아했다.
후배는 불어도 전공했지만 영어, 일본어에도 능통해 영어 강사로도 오래 활동했다. ‘넷플릭스’로 우리나라 드라마를 볼 때도 텔레비전 화면 하단에 영어 자막이 깔리게 해놓는다. 요즘 방과 거실의 가구를 재배치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다. 꽃꽂이 솜씨를 보면 가구 배치 향방도 짐작이 간다.
부르기도 편하고 계절명이기도 해 무수히 불릴 텐데 봄이는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어떨 기분일까 궁금했다. 나를 보면 삼촌이라고 불렀다가 후배 내외처럼 '태신 선배'라고도 부르는 활기찬 아이다. 봄이는 자기 방을 스스럼없이 소개해주고서 혈액형 관련 만화도감을 들고 와 내 혈액형을 알아맞히는 시간도 리드해주었다. 내 혈액형으로 내 성격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나는 봄이와 존경어투로 대화를 나눈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아이하고의 그런 식의 대화가 좋다.
가구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후배 남편이 내가 온다는 소식에 한우 육회를 사 가지고 퇴근했다. 아내 따라 불문학과 행사에 자주 참여하면서 멋진 사진을 찍어주곤 했다. 지난해엔 우리 가족 스튜디오 사진도 찍어주었다.
술고래인 후배 남편이 계란 노른자위를 육회와 뒤섞어 먹음직스럽게 안주를 만들었는데 맛이 일품이었다. 마침 내가 사 간 와인이 육고기(특히 쇠고기) 음식과 궁합이 맞는 ‘셰프의 추천’(Suggestion du Chef)이라는 프랑스 와인이어서 금상첨화였다. 후배 남편이 하는 말. “다음에 만날 땐 한우 사시미를 준비해 볼게요.” 군침이 도는 말이다.
“도봉산은 잘 있고요?
역시 후배의 카톡 문자다. 다음날엔 내 동생들과 산행을 예정해둔 상태다. 군대 가 있는 아들 방에서 잠을 자고, 토요일 오전을 봄이 태권도장 보내고 셋이 카페 야외 테라스에서 봄날의 바람을 쐬고 봄날의 대화를 나누었다. 의정부시에 있는 후배 집에서 도봉산은 버스로 30분 이내 거리에 있어 편히 갈 수 있었다. 둘째 동생이 장소를 정했는데 자신에게 ‘선견지명’이 있다고 우쭐해했다.
도봉산은 해방구처럼 등산객들로 붐볐다. 산목련은 원래 그런지 도심의 목련보다 꽃잎 크기가 작아 보기 좋았다. 진달래는 등산객과 조금 거리를 둔 숲 안쪽에서 연분홍의 가녀린 자태를 보이고 있다. 막 돋아난 단풍나무 잎은 얼마나 앙증맞던지.
도봉산 마당바위 밑 천축사에서는 템플스테이의 유래를 확성기로 전해주고 있었다. 말하는 이의 목소리 톤과 설명 내용이 절로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었다. 종착지로 삼은 마당바위에서 희뿌연 연무가 가득한 도심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등산의 묘미를 느꼈다. 몇몇 봉사단원이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해 연등을 달고 있었다. 산 중턱 풍경을 훼방하지 않으면서.
하산하고서 두부 전문점에 들렀다. 두부전골을 시켰는데 마음에 들었다. “정말 맛있어요. 국물 맛이 끝내줘요” 했다. 주인이 아니라 서빙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한 말이지만 내 말을 듣고 기분은 좋았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삼형제는 그간의 생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19년 된 차를 폐차하고 새 차를 구입했다는, 그에 못지않게 대학졸업 후 지금까지 줄곧 한 직장에 다니고 있는 막내 동생. 회사에서 코로나와 전쟁 등으로 자재 구입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둘째 동생, 나의 물류센터 일 등등. 산 밑의 주막은 문을 일찍 닫는다. 다음날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후배에겐 그렇게 답변했다. “도봉산은 잘 있어.”
내가 다니는 물류센터 채용팀은 다른 센터에서는 본 적이 없는 조금 각별한 면모를 보여주곤 해 나를 놀라게 한다. 퇴근 셔틀버스가 각지로 출발하는 새벽 4시 20분쯤 단체문자를 보내는데, 그날그날의 날씨와 분위기를 소재로 삼아 매일 다른 내용으로 글을 작성한 뒤 오늘 하루 수고하셨다는 말을 덧붙여 전송해준다. 4월 11일엔 “따뜻해진 아침 공기와 형형색색 피어난 봄꽃들이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4월 14일엔 “봄비가 내리더니 다시 아침저녁으로 추워진 것 같습니다.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시고, 건강한 4월 되시길 바랍니다.” 등등.
안 해도 되는 일이지만 하면 좋은 일이다. 과잉이 없는 친절, 슬그머니 내놓는 덕담, “알겠습니다”보다는 감사하고 고맙다며 끝내는 인사말, 콜센터 상담직원에게 궁금한 점을 묻기 전에 “수고하십니다” 하고 먼저 말 건네기. 내일 새벽엔 어떤 문자 내용이 고단한 노동으로 지친 사원들에게 전해질까.
봄날의 말들이다. 그냥 ‘봄의 말들’이라고 칭하고 싶다. 봄기운이 우리 마음을 예열시켜 나오는 말들이기에. 여름 기운이 우리 몸을 가열(과열)시키기 전에 그런 봄의 말들을 자주 듣고 전하고 싶다.
올해 3월은 양력과 음력이 나란히 가는 달이다. 4월 3일은 음력 3월 3일, 오늘 4월 15일은 음력 3월 15일 이런 식으로. 오늘 새벽 퇴근길에 리허설 준비 중이라 완전한 모양은 아닌 보름달을 보았다. 오늘 밤엔 진짜 보름달이 둥실 떠 있을 텐데 12시 전 쉬는 시간 잠깐 건물 밖으로 나가봐야겠다. 여러분도 꼭 보시길. 봄의 보름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