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그림자

by 박태신

‘그림자’의 사전 풀이는 “물체가 빛을 가려서 그 물체의 뒷면에 드리워지는 검은 그늘”(표준국어대사전)이다. 한 예로 지구를 중심으로 볼 때 규모가 아주 큰 그림자는 우리 눈에는 동전 크기일지라도 지구가 태양을 가려 달이 어둡게 보이는 월식 그림자일 것이다. 그 그림자는 드문 존재인데, 반면 자주 볼 수 있고 윤곽이 보다 선명한 그림자는 대기 위쪽으로 지나가는 구름이 태양을 가리며 산등성이에 자기 크기만큼 만드는 그림자다. 그 그림자는 구름의 운행에 맞춰 느린 행보를 따라 하면서 산자락을 윤기 있는 피사체로 만들어 준다.


구름 그림자라고 할까 이런 그림자도 멋지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자는 잎그림자다. 나는 햇빛을 마음껏 쬔 한 나무의 위쪽 가지 잎들이 아래 가지 잎들에게 남기는 진한 흔적을 잎그림자라고 부른다. 사전에 없는 단어이지만 나는 이 단어를 좋아하고 이 잎그림자들이 도드라질 때의 모습을 사랑한다. 잎이 투명해서, 투과성이 높아서 생기는 현상. 두툼해서 불투명한, 그렇게 ‘낯짝 두꺼운’ 잎들은 만들어내지 못하는 여린 감성을 지닌 여과지 같은 잎. 그렇게 잎들은 간격을 두고 포개져 그림자를 만들더라도 서로 달라붙지는 않는다. 잎의 주체성이다.


전전날 비가 내리고 대기가 약간의 냉기를 담고 있는 4월 말의 고지대 숲 잎들은 햇빛이 절실하다. 잎들은 찬 이슬을 머금기도 하지만 따뜻한 햇빛을 더 머금고, 아니 쭉쭉 빨아들이고 산다. 이슬 같은 수분 공급은 뿌리가 주로 담당한다. 잎이 햇빛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나무는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한다. 광합성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 나무는 수분과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뿌리 힘’(‘생존본능의 힘’)으로 살지만, 잎들은 생존보다는 고양된 성장을 위해, 살아있음의 쾌감을 위해 본능적으로 햇빛에 마음껏 자신을 노출시킨다고.


며칠 전 일본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보았다. 여고생 여주인공 사쿠라는 자기 몸의 췌장이 쇠약해져 1년도 못 되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데 그걸 알고도 아주 밝게 사는(잎들이 햇빛을 받아 고양된 것처럼), 그러니까 1년이 못 돼 가지에서 떨어져 나가 낙엽, 고엽이 돼버리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봄 햇살에 마냥 즐거워하는 사진 속 단풍나무 잎과 닮은 삶을 살고 있다. 사쿠라는 우연히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동급생 하루키에게 다가가고 즐거운 날들을 만들어 가려 애쓰는데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하니 꼭 잎들이 햇빛을 갈구하는 모습과 같아 보인다. 사쿠라는 남자친구를 통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실현해나가고, 덕분에 목석같고 주위 사람들에게 일절 관심을 두지 않던 무뚝뚝이 하루키는 단풍나무 잎 같은 사쿠라를 통해 살아 있음의 활력을 배운다.


내가 들른 숲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나는 유독 빛 투과성이 높은 잎을 지닌 단풍나무가 주위에 만들어놓은 화사한 분위기에 매료되고 말았다. 높은 가지의 잎들은 새로 돋아나서 연두색에 가깝기도 하지만 햇빛에 온전히 노출돼 더더욱 광채를 띠고 있다. 덕분에 빛들은 아래 가지 잎들에게 전해지고 잎그림자가 만들어지며 한두 그루의 단풍나무 주위는 마냥 거주하고 싶은, 환한 숲속의 방이 된다. 아쿠아리움에서 관람객들은 수족관의 통로만 지나다닐 수 있으며 양옆과 천장을 뒤덮은 수족관에서 마음껏 율동적으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바라보기만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숲의 탐방객들은 자신들 위를 뒤덮은 키 높은 나뭇가지 아래에서 객식구 단풍나무가 만들어 놓은 금단의 지역을 보고 황홀해할 뿐이다. 식물학자의 저서(<보따니스트>)를 번역했지만, 나는 결코 식물학자처럼 될 수가 없을 것 같다. 나뭇가지를 잘라내고 발밑의 식물을 짓밟으면서까지 저 금단의 지역에 들어갈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잎그림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 키 큰 나무만 이야기했지만 숲의 더 많은 부위를 차지하는 곳은 빛이 적게 도달하는 음지, 숲의 하층부다. 그러나 이 숲은 음지식물에겐 더 없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햇빛을 강하게 받으면 죽어버리는 식물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키 큰 나무들은 빛을 통해 쾌활함을 만끽하면서도 사실은 약간의 빛으로도 만족하는 음지식물을 보호해주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 벌목꾼 때문에) 커다란 나무들이 잘려 나간 숲 가장자리는 식물의 수도, 크기도 빈약한 상태지만 햇빛을 풍부하게 받으면서 성장해 점차적으로 그늘을 만들어 낸다. 그 그늘 밑에서 또 다른 씨앗들이 발아하고, 어린 새싹들은 태양빛에 탈 위험 없이 연한 잎을 내며, 어둠을 좋아하는 식물들이 안전하게 자란다. 이런 메커니즘이 연속해 이루어지면서 숲은 이런저런 종, 큰 나무와 작은 나무, 이끼들로 풍부하게 채워진 복잡한 세계가 된다. 오직 한없이 느린 이 메커니즘에 따라서만 숲이 다시 태어난다”(<보따니스트> 중에서).

흐린 날의 구름은 잎들에게 훼방꾼이 된다. 그렇지만 구름은 알아서 자리를 피할 줄 알고, 구름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태양도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숲속은 골고루 빛이 투과될 수 있고, 덕분에 음지 속에 핀 식물도 작은 꽃들을 피워낼 수 있다. 위 사진 속의 꽃은 무대 위에서 조명을 가득 받으며 사지를 쭉 뻗으며 비약하는 발레리나 같다.


제주도 비자림을 탐방했다. 10미터가 넘는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밀집해 있는 숲이다. 인간의 시각이지만 비자림은 인간과 숲이 타협을 통해 서로를 생얼로 만날 수 있게 조심스레 조성된 구역이라 말하고 싶다. 그 비자림에서 숲의 주인공 비자나무 대신 소수민족인 단풍나무를 비롯해 햇빛으로 유희를 즐기는 식물들에 반하고 내려왔다. 그래도 덜 미안한 것은 나처럼 이런 별난 짓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숲은 보지 않고 나무만 보는 소인배의 행동을 거리낌 없이 했다. 숲은 그걸 허용하기 때문에 숲이다. 포용력이 크다.


그렇다고 숲이 인간에게 마음껏 들어오라고 불러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꺼린다. 그러나 인간은 숲에 들어갔고 지배했고 유린했다. 벌목을 했고 불을 질렀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자성을 했고, 숲은 생존을 위해 타협하는 법과 위기관리하는 능력을 키웠다. 인간은 자연보호구역을 지정하고 멸종식물을 보호하며 식물종 다양성을 위해 애쓰고 있다. 숲은 인간의 출입을 허용하고 심지어 공존하되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인간이 깨닫게 만들었다. 이제 숲은 도시 여기저기에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직도 나는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 발밑의 식물들을 밟고 들어가는 일은 잘하지 못한다. 다만 밟아도 괜찮다 여기는 길목은 걷는 것을 허락하기로 했다. 내 몸에 다가온 곤충은 함부로 내치거나 죽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소심한 모습이다.


처박혀 있던 필름카메라를 8년 만에 꺼내 위 사진들을 찍었다. 줌을 활용하고 조리개를 조절했다. 8년 만의 필름카메라 출사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숲을 거니니 가라앉았던 마음이 생동감을 되찾았다.


자주 마음이 폭탄을 맞아 쑥대밭이 돼버렸다가도 환기된 분위기와 잠깐의 명상으로 원래 평온을 되찾곤 한다. 그 폭탄은 외부에서 날아온 것이기도 하지만 내 안에서 터뜨린 자해 폭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잎그림자와 피톤치드가 나를 무장해제시키곤 한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잎그림자는 내가 사는 동네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 새벽 5시경에 발견한, 해가 뜨면 금세 모습이 사라질 금성과 목성, 한밤중의 소쩍새와 개구리 울음소리, 차분하라고 다독이는 산책로의 무릎등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모두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누리라고 추근대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핸드폰 화면에 위 사진 중 잎그림자 가득한 한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깔았다. 이 사진들을 소개하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이제야 그럴 수 있었다. 요즘은 마음의 빗장을 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나는 햇빛을 마음껏 받는 위쪽 가지 잎들보다는 잎그림자가 만들어지는 아래 가지 잎들과 성향이 비슷하다. 그게 내 모습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 글을 다 쓴 무렵에서다. 글은 그렇게 자기 앞길이 궁금한 개개인의 인간과 닮은 구석이 있다. 글을 써보길. 발표하든 하지 않든 글을 써보길. 햇빛이 나를 투과해 보이는 모습을 우선은 나만 살펴보기를. 보이지 않는 광합성이 내 몸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은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