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전야’라는 말을 자주 쓴다. 실제 폭풍, 또는 일어날 확률이 높은 큰일의 직전을 의미하고 그날을 대비해 준비 태세를 갖춘다. 한편 지구 상공에 무사히 안착한 누리호처럼 이런저런 위성 덕택에 예보와 예측이 좀 더 확실해져서, 일기예보를 수없이 접하는 요즘 사람들은 연중행사의 정해진 날짜처럼 오늘부터 ‘장마 전야’를 대비하고 있다. 행동반경을 좁히기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나는 은근 장마를 기다려왔다.
가뭄을 해갈하기 위해서라는, 논밭 근처에도 가지 않는 도시 소시민의 궁색한 명분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솔직하게 내가 밤새 일하는 물류센터 건물 안이 찜통더위라서 그렇다고 해야겠다. 작년까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핸디형 선풍기를 사서 그 선풍기 바람을 쐬며 일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젊은 사람들이나 쓰는 것이고 더위에 강한 체질인 나는 이따위 더위쯤 거뜬히 견딜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1년 사이 핸디형 선풍기의 성능과 디자인이 일취월장하고 다양해졌으며, 센터에서도 사원들 각자 각양각색의 제품을 주요 소지품으로 달고 일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결국 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다음 내 몸이 그 물건을 간절히 원했다. 금세 이 선풍기 덕분에 “삶의 질이 달라졌다”라고 동료사원에게 고백할 정도로 나는 줏대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그래서 온습도계의 습도 수치가 최고치를 향해 높아질망정 장마는 마중 나가 맞이해도 되는 반가운 상대가 되었다. 그런데, 그러나, 그렇지만 이것만은 아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다 좋아하는, 누가 보기에 다소 치기 어린 취향을 지녔다. 눈, 비, 안개(하강한 구름), 별빛, 노을빛, 어둠의 장막, 영상으로만 본 오로라 등등. 더위가 기승을 떨치던 여러 날 전 이틀에 걸쳐 새벽 비가 왔더랬다. 물류센터 밖으로 포장된 제품들이 실리는 대형트럭 사이로 거센 빗줄기가 콘크리트 바닥에 내리 꽂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건물 철제 지붕을 쳐대는 강약의 연속음을 들었다. 마음이 동했다. 그 소리가 좋았다. 비유로 말해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땐 영화 <샤인>에서 들은 피아노곡 ‘왕벌의 비행’이 연상되었는데, 그 왕벌이 멜로디 없이 일정한 박자로 날갯짓할 때의 피아노 소리 같다고나 할까. 그러다 빗줄기가 거세지면 KTX 열차가 터널 속을 지나갈 때의 소리 같은 지속음이 이어진다. 센터 꼭대기 층 지붕 밑을 돌아다니는 나의 청각 안테나가 기민하게 작동한 덕분이다.
안개비나 이슬비도 좋지만 ‘긴 막대기’라는 뜻의 ‘장대’와 합성된 장대비가 더 좋을 때가 많다. ‘장마’는 순우리말이고 장대비는 ‘길 장(長)’ 자가 들어간 합성어이지만 내겐 같은 뉘앙스로 다가온다. 장마엔 장(長)우산이 제격이다. 고어 ‘댱마’가 ‘쟝마’, ‘장마’로 변모한 것이라는데 분명 한자어가 들어간 '장대비'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요즘 비는 오지 않는데 흐리기만 한 날씨 때문에 속상한 적이 많았는데 퇴근 무렵, 우주로 치면 태양계라는 작은 외딴 마을, 지구의 이웃인 행성들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항공기가 목적지를 향해 갈 때 정해진 항로가 있듯 태양의 하루 항로가 있는데, 6월 맑은 날 새벽 4시쯤 동쪽 하늘을 보면 그 항로 주변으로 아직 떠오르지 않은 태양의 빛이 간접 조명이 돼 보이는 금성, 화성, 목성, 토성 이렇게 네 개의 행성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
퇴근 사인을 하듯 하나의 의례처럼 나는 그 행성들을 확인하고(또는 보지 못해 서운해하고) 셔틀버스에 오르곤 했다. 나 혼자 옥상 주차장 동쪽 담벼락 앞에 서서 그 신기한 광경을 지켜보았는데 그 광경에 관심 있는 이가 없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저게 금성, 목성이에요 알려주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장마 전야인 23일 오늘 새벽, 요 며칠 밤새 구름들이 각개전투로 반달 또는 하현달 앞을 가로막곤 하던 그 무렵 틈 사이로 하현달 바로 위의 화성과 왼쪽, 오른쪽 멀리 금성과 목성을 볼 수 있었다. 장마 전 작지 않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개발이 덜 되던 오래전 시절, 멀리 보이는 어느 한 마을 집들 중 밤이 고단한 집주인이 켜놓은 백열등 같다고나 할까. 그런 후의 장마는 그래서 내게 더욱 귀한 손님이 되었다.
1년마다 만나는 장마처럼 요즘 오래된 친구 같은 두 권의 책을 다시 읽고 있다. 문태준 시인의 산문집 <느림보 마음>, 프랑스 시인인 프랑시스 잠의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곽광수 옮김)가 그것이다. 전자는 들뜨곤 하는 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근무 시작 전에 읽고, 후자는 자꾸 달아나려 하는 프랑스어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책 속 원문과 함께 읽고 있다. 앞의 책은 구입한 지 10년이 돼 세월의 더께가 잔뜩 끼였고, 후자 책은 오래전부터 내가 지니고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주고 만 데다 품절된 지라 도서관에서 빌렸다. 복사하고 스프링 제본하면 다시 내 골동품이 될 것이다.
둘은 장마 중에도 나와 함께 할 것이다. 결이 비슷한 책이다. 읽고 감상하느라 읽는 속도는 느려 터져도 내 마음은 곡식이 가득한 창고 같을 것이다. 두 권 내용 중 수없이 읽어도 좋을 부분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내 장마철은 복될 것 같다.
<느림보 마음>---------
일이 오기 전에 마음이 너무 앞서서 미리 걱정하지도 말 일이다. 마음도 쉬어야 한다. 마음이 쉬는 것이 참된 지혜라고 했으니, 우리의 몸이 여름날 시원한 바닷가를 찾아가듯이 (상상으로라도) 당신의 마음도 해변의 백사장을 찾아가 한가롭게 거닐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내 삶의 리듬은 내가 유지할 필요가 있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자주 할 일이다. 지금 나를 이곳에 데려온 당사자는 바로 나인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중심이다. 내가 내 삶의 경영자이다.
(‘시원하고 푸른 한 바가지 우물물 같은 휴식’ 중)
(애완동물로 들인) 거북이는 자기 살림의 질서를 나름대로 갖고 있었다. 한가하고, 욕심을 적게 부리며, 기다릴 줄 알며, 서두르거나 조급하지 않으며, 침묵을 즐기는 고아한 성품이 있었다. 나는 그의 품성이 마음에 들었다. 말하자면 거북이는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처세가 있었다.
(‘강아지 대신 거북’ 중)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
검은 참나무 밑에 나는 앉았다. 그리고
생각을 버렸다. 지빠귀 새가 나무 높이
내려앉았다. 그 밖에는
조용할 뿐. 그 고요 속에서
삶은 장려하고, 정답고, 엄숙했다.
내 개 두 마리가 날고 있는 파리를
삼키려고 노려보고 있는 동안,
나는 내 괴로움을 대단찮게 생각하게
되었고, 체념이 내 영혼을
슬프게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조용한 숲속에’ 중)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을 따는 일,
……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 아이들 옆에서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