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

by 박태신

기억도 가물가물 참 오랜만에 무궁화호 열차를 탔다. 청량리에서 영주까지. KTX 고속열차에 익숙해진 내 몸이 완행열차에 올랐다. 역시 노인 분들이 많았다. 내 통로 옆자리에는 남녀 둘둘 네 분이 마주앉고서 두 시간 넘게 수다를 떠셨다(결국 나는 다른 객차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무궁화호 열차를 타면 좋은 것이 창 너머 멋진 풍광을 오래오래 즐기며 여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직선을 좋아하는 KTX와 달리 무궁화호 열차가 지나가는 구불구불 곡선 길 주변은 한적하고 수풀 우거진 곳이 많다.


부산에서 3년 살았는데 서울로 올라가려면 늘 KTX를 이용했다. 무궁화호 열차를 탈 마음의 여유와 넉넉함이 사라진 지 오래다. 올해로 KTX 개통 15주년이 되었다. KTX를 질시의 대상으로 보고 글 하나 쓴 때가 2005년이었던가. 막상 무궁화호 열차를 타려고 해도 좌석 얻기가 힘들다. 급하게 예약하거나 당일 역에 가서 표를 끊는 성향을 지닌지라 그럴 때 무궁화호 좌석은 매진돼 있기 마련이다. 운행 횟수도 적고 많은 경우 시간의 구애를 덜 받으시는 노인 분들이 미리 예약해두기 때문이다. 2011년 나를 만나러 어머니와 이모가 내려오실 때도 두 분은 그렇게 하셨다.


표는 영주까지 끊었지만 사실 목적지는 봉화 청량산이다. 아뿔싸! 열차를 타고 핸드폰으로 인터넷 검색하고서야 알았다. 영주에서 봉화를 거쳐 청량산에 가려면 버스를 갈아타며 두 시간 20분 더 가야 한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영주역에 내려서 30분 헤매기도 했다. 봉화에 도착해서는 30분 동안 시골버스 출발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기로 한 여행이었지만 힘들긴 힘들었다. 청량리에서 오후 1시 출발했는데 청량산 도립공원 도착하니 6시 20분이었다.

봉화 공용버스터미널 7번 완행버스 탑승구 뒷벽 꼭대기에는 제비집이 하나 있다. 어미가 먹이를 물고 들어갔는데 새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려 정신이 없는지 한참을 올려다봐도 내게 꽁지만 보여준다. 지쳐 고개를 내렸다. 아직 제비 보기가 이른 시절인지 3일 동안 이곳 어미 제비 한 마리만 봤을 뿐이다.


청량산 도립공원행 시골버스. 대부분 노인 분들이고 고등학생 한 명과 중년 여성 한 명이 버스길에 동행했다. 할머니들에겐 다들 짐이 있었다. 그중 한 분은 유독 짐이 많았는데, 허리가 굽고 지팡이까지 짚고 계셨다.

창밖으로 간간히 플래카드가 보였다. ‘태양광 폭탄’이란 문구를 보고 이곳 읍내 주민들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밭 한가운데 짧은 끈에 묶인 독수리 연이 바람에 나부끼며 허수아비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시골버스는 배차간격이 도시버스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길다. 인내심이 필요하다. 또 노인 분들이 안전하게 타고 내릴 수 있도록 정류장마다 정차하는 시간이 길다. 한 정거장에 버스가 섰다. 허리 굽은 할머니가 내리려고 하신다. 짐이 세 보따리였다.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중년 여성이 재빨리 다가가 할머니의 두 짐 보따리를 들고 정류장에 내려놓았다. 할머니가 내리시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같이 타고 있던 어르신들이 칭찬의 시선을 주고받으신다. 시골버스는 느리지만 후한 인심도 태우고 다닌다.


다음날 청량산 주변을 돌아보고 봉화로 되돌아가는 같은 시골버스를 기다렸다. 청량산 도립공원 출발 정류장에서 손님은 나 한 명. 출발시간까지 얼마간 여유가 있어 나는 버스 밖 근처에 앉아 한적한 녹색 빛 풍경을 더 즐겼다. 운전기사는 핸드폰에 몰두하고 있었다. 일찍 타면 서로 조금 어색했을 것 같아 출발 몇 분 전 버스에 올랐다. 창밖으로 두툼한 가지 하나가 잘려나간 벚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청량산을 돌아 흐르는 낙동강 따라 버스 유람을 마저 즐겼다. 우람한 산과 넓은 강, 창문을 활짝 열고 이 둘과 노닥거리는 바람을 혼자 한껏 쐬었다. 몸이 조각나도 좋을 시원하고 세찬 그리고 깨끗한 바람이었다. 느린 여행이 주는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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