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에서 소수서원 가는 버스는 인삼으로 유명한 풍기를 거친다. 소수서원을 산책한 후 돌아올 때는 풍기에서 내렸다. 무궁화호 열차가 서는 풍기역이 있기 때문이다. 표를 예매하고 소읍을 둘러보았다. 오래된 집과 가게가 많았다. 역시 인삼 가게가 많았다. 하얀 귀룽나무 꽃이 포도송이처럼 피어나던 5월 초다.
저녁으로 청국장 정식을 선택했다. 나는 숙성시킨 것은 다 좋아한다. 고추장, 된장, 청국장, 와인 등. 식당 식탁 옆 벽면에 특이한 것이 있었다. ‘수저 받침 종이’. 수저 받침 종이가 따로 구비돼 있는 모습은 처음 봤다. 한 장을 꺼내 식탁에 깔고 수저를 놓았다. 모양새 나는 풍경이 되었다.
역 앞으로 돌아왔을 때 해가 소백산맥 너머로 지기 전에 인삼 색의 일몰 풍경을 보태주었다. 태양 옆에 탑 하나가 도드라져 보였다. 급수탑이다. 풍기역 급수탑은 철도 문화재다.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세웠다. 지금은 인삼 그림을 옷처럼 두르고서 오래전 멈춰 선 증기기관차와 함께 왕성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증기기관차 기관실에 올라가 보았는데 연료가 들어가는 화로 장치가 중앙에 큰 비중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양 옆으로 등받이 없는 간이 운전석이 있었다. 화로에 수시로 석탄(이 기관차는 최신식이라 석유)을 퍼 넣었으며, 좁은 의자에 앉아 역시 좁은 앞창으로 선로를 살폈을 고단한 기관사들이 떠올랐다.
어둑한 시간, 풍기역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이곳 플랫폼 승객 대기실은 남달랐다. 대기실이 콘크리트 받침을 밑 대고 플랫폼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서 불을 밝히고 있었다. 상석이다. 열차와 키 높이를 같게 하고 싶었나 보다. 열차 쪽을 향해서만 의자가 길게 배치돼 있었는데 열차가 들어오는 모습을 대형 유리창으로 지켜볼 수 있다. 승객 입장에서 조금 더 대접받는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 삼각형 꼭짓점에 헤드라이트 하나씩 불 밝힌 무궁화호 열차가 커브를 돌고 역 안으로 들어왔다. 열차에 올라 내 좌석에 몸과 배낭을 풀었다. 통로 옆 좌석에 할아버지 한 분이 누워 계셨다. 그냥 누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신을 벗고 다리를 맞은편 좌석에 뻗고 계셨다. 앞 좌석을 돌려 마주 보게 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누워 있는 할아버지 앞에 와서 머뭇거리신다. 본인 좌석이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고쳐 앉고서 할머니가 창가 자리에 앉게 하셨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다시 예전 모습으로 누우신다. 할머니가 안쪽에 갇힌 모양새다. 그런데 당황스러웠을 할머니는 무던하게도 몇 시간을 그대로 참고 계셨다. 내가 다 놀랐다. 어쩌면 무궁화호 열차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일 것이다.
급수탑은 물 보관량이 많아지므로 높을수록 좋겠다. 그날 나는 급수탑만큼 높은 배려를 보았다. 상석 대기실도 하나의 아이디어였겠지만 배려라 생각하고 싶다. 혹은 수저 받침 종이 두께만큼의 배려만 있어도 좋을 때가 많지 않을까. 하얗고 노르스름한 감꽃이 열리기 시작한 날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