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선물은 사양합니다

달콤한 책의 시간을 스스로 만들자

by 희붐

대학교 때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꼬박 3년을 채우면 졸업식을 했다. 거창한 건 아니고 동아리 사람들끼리 모여 밥 한 끼를 먹는 자리였다. 좋았던 건 후배들이 그동안 내가 쓴 글을 모아 스크랩북으로 만들어줬다. 더 좋았던 건 그다음 받은 선물이다. 한 선배가 커다란 종이봉투를 건넸는데, 다섯 권의 책이 들어있었다. 책 한 권 사는 데도 큰마음을 먹어야 했던 시절이라, 책 뭉치는 그때 받은 선물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이었다. 그중 한 권이 공지영 작가의 <착한 여자> 2편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1편은 없고, 덩그러니 2편만 수수께끼처럼 담겨 있었다. 감동은 순식간에 달아났다. 1편만 선물하고 2편은 직접 사서 보라는 예고편 같은 메시지는 본 적이 있건만, 2편만 준 것의 의미는 도통 가늠이 되지 않았다. 며칠 지나 결론을 내렸다. 그날 선배는 서점에서 나름의 기준으로 몇 권을 골라온 듯한데, 어떤 책인지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은 듯했다. 그건 그 이의 탓이라기 보다는, 책은 그저 좋고 유익한 거라는 끝없는 관대함이 만든 이상한 결과였다. 책은 과연 관대할까? 독서는 꽤 시간과 집중을 요하는 일이라, 사람들은 베스트셀러나 전문가에게 기대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책은 다 좋은 거라 믿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읽는 책을 골라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책의 소리는 모든 독자에게 울리지 않는다. 또박또박 문장을 읽는 건 단지 단어의 조합을 확인하는 것일 뿐, 작가와 독자가 함께 느끼는 공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글마다 저자 고유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데, 그 소리는 진동수가 맞는 독자를 만났을 때 비로소 울린다. 그리고 자신을 간절히 찾는 독자 앞에서야, 책은 한 사람만을 위한 도톰한 편지로 변신한다. 그때 작가는 삶의 마지막 방어선을 지키고 선 사람이 된다. 작가가 정성 들여 쓴 문장은 이 계절을 덜 외롭게 해주고, 못내 터져 나온 실밥 같은 중얼거림도 귀하게 여겨준다. 그런 책은 베스트셀러 책장에 있지 않고, 독서 권장 목록에도 있지 않다. 어디가 가렵고, 어떤 기분을 맛보고 싶고, 어떤 세상을 꿈꾸고 싶은지, 내가 출발점이 될 때 책은 이야기의 여정을 시작한다. 지난가을 김해에 책 축제를 보러 갔다. 지자체와 정부기관과 수십 개의 공공기관이 '책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겠다'며 작정하고 만든 자리였다. 거기에서 한 작가가 '책 따위가 뭐라고!', 외쳤다. 책이 마음의 양식이란 엄숙한 소리는 이젠 그만하고, 이따금 맛있게 먹자고 덧붙였다. 의무감이 아니라 즐거움과 취향으로 찾는 간식처럼. 꼭 몸에 좋을 필요도 없고, 매 끼니마다 챙기지 않아도 된다니, 듣는 것만으로도 홀가분해지는 소리였다. 그런데 강연이 마무리될 때쯤, 주최 측에서 사진을 찍는다며 현수막을 길게 펼쳤는데,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일곱 글자가 반듯하게 인쇄돼 있었다. 우연치고는 기막힌 인쇄 사고였다. 세상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자기 계발서를 꼬박꼬박 읽고, 가끔 마음의 양식을 채우고 싶을 땐 베스트셀러를 찾는다. 책 선물은 서점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매대에서 고른다. 이 독자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정말이지 시시하고 재미없을 것이다. 남의 말로 내 인생의 페이지를 채우는 건 무지 아까운 일이니깐. 그래서 그의 독서는 다음 경로가 훤히 내다보이는 큼지막한 내비게이션를 따라가는 것과 같다. 베스트셀러는 책 꽤나 읽은 사람들이 지은 수십만 가지의 죄 중에 하나다. 많이 팔리는 책은 더 많이 팔리고, 적게 팔리는 책은 더 적게 팔리는 요상한 책 시장에서 우리가 맛있게 간식을 먹는 방법은 하나다. 이제 책을 추천받는 건 사양하고, 달콤한 책의 시간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겨울 밤거리에서 어묵 국물을 들이키며 한숨인지 뜨거운 입김인지 모를 것을 푹푹 내쉴 때, 그러니깐 누구에게라도 마음을 털어놓고 싶을 때, 그때가 바로 책을 읽어야 할 시간이다. 어떤 책은 평생을 거쳐 쓰는 반성문과도 같다. 간절한 순간에는 오랜 시간 꾹꾹 눌러진 활자들이 말을 건다. 그리고 행간 속에 당신의 이야기를 꼭꼭 숨겨줄 것이다.


"독서는 달콤한 거"라는 명언의 주인공은 바로 두근두근 김중혁 작가님.


[국제신문-감성터치](18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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