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를 너무 많이 본 청소년 2
요즘과 같은 인터넷 세상이 아니었기에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가 주로 신문이나 잡지 같은 인쇄매체였던 1989년, 61회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 5편의 리스트는 당장 주연 배우들의 이름만으로도 흥분 그 자체였다. 더스틴 호프만, 톰 크루즈(레인맨), 윌리엄 허트, 캐슬린 터너(우연한 방문객), 진 핵크먼, 윌렘 데포(미시시피 버닝), 해리슨 포드, 시고니 위버(워킹걸), 그리고 글렌 클로즈, 존 말코비치, 미셸 파이퍼, 우마 서먼, 키아누 리브스가 나온 <위험한 관계 Dangerous Liaison(1988)>.
3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어느 작품 하나 빠지지 않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작품상 후보작 리스트이지만, 저 중에서 <위험한 관계>가 가지는 무게감은 내게 남다른 감흥을 전한다. 할리우드 직배 1호 영화로 당시 악명 높았던 <위험한 정사>를 통해 강렬하게 각인된 글렌 클로즈가 또 다른 ‘위험한’ 영화의 주연을 맡았다니, 작품상 수상작인 <레인맨>보다 <위험한 관계>가 100배는 더 궁금했다. 하지만, 국내 극장 개봉은 하지 않았고 (했더라도 ‘연소자 관람 불가’ 등급이니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어차피 극장에서는 보지 못했을 테지만), 대신 SKC 비디오로 출시되었고, 나의 유년 시절, 미래의 씨네필로서 소양을 함양하는 데 큰 도움을 주신 ‘나 상가’ 비디오 가게 사장님 덕분에 갓 출시된 <위험한 관계> 비디오테이프를 누구보다 빠르게 대여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이는 그때 첫 관람 이후, 나는 영화 <위험한 관계>의 열혈 팬이 되었다. 영화관 스크린은 아니지만, TV 화면을 꽉 채우는 배우들의 불꽃 튀는 연기는 피 튀기듯 지독하게 펼쳐지는 치정극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고, 화려한 프로덕션 디자인, 의상, 조지 펜튼의 유려한 음악, 필립 루슬로의 촬영까지,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조합된 ‘종합 예술’로서 영화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듯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때 을지로 입구에 있었던 ‘쁘렝땅 백화점’ 지하에 ‘청춘극장’이라는 상호의 가게에 자주 구경 갔던 적이 있었다. 온갖 중고 비디오가 즐비한 그곳에서 <위험한 관계> SKC 출시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한 순간, 온몸을 감싸는 희열에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판매가를 듣고 난 직후, 잠시 고민에 휩싸였었다. 5만 원! 당시 정확한 비디오 출시가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5만 원은 아니었을 것이다. 심지어 여러 사람의 손을 탄 중고 비디오 주제에 5만 원이라니. 그만큼 <위험한 관계>는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지만,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알만한 그런 부류의 영화여서 그랬으려나. 지금도 5만 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양하지만, 갓 성인이 된 내게 5만 원은 더더욱 큰돈이었으므로, 그 돈을 지불하고 <위험한 관계> 비디오테이프를 살 순 없었다.
몇 년 전 북미에서 출시한 블루레이를 구매했고, 오랜만에 <위험한 관계>를 다시 봤다. 역시 언제 다시 봐도 멋진 영화이다. 하지만 얄궂게도, 쨍한 화질의 블루레이를 보면서도, 화질은 떨어지고 한글 자막 폰트도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던 비디오로 이 영화를 봤을 때의 감흥이 그리워진다.
※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2022년 7월 30일 발간한《아카이브 프리즘 #9 Summer 2022 "리와인드 - 비디오 시대의 어휘들》에 기고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