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낙하산이 비처럼 내려와
돌이켜보면, 첫 영화사에 입사할 당시엔 나도 낙하산이었다. (몇 번을 반복했지만) '영화 관련 경력 1년 이상'이라는 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해 영화사에 입사지원서를 내지도 않고 포기했었지만, 이른바 '인맥'을 타고 영화사에 입성했으니 낙하산과 다름없었다. 그것도 회사라고는 영화사도 아닌 회사에 7개월 다녔던 게 유일한 경력이었는데도 '대리'를 달았으니, 당시 그 회사에 나보다 먼저 입사했으나(정확한 입사일은 모르지만) '사원'이었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분명 낙하산이었다.
하지만, 당시 낙하산으로서의 내 위상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사원과는 부서도 달랐고, 직급만 대리이지 누군가에게 업무 지시를 내릴 일도 없었고, 또 어떤 업무에서건 일말의 책임 같은 게 부과되지도 않았으니.
그로부터 몇 년 뒤 입사한 다른 회사에서는 이런저런 다양한 형태의 낙하산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 주변 부서에 안착한 낙하산들이었기에 늘 방관하는 입장이었다. 낙하산이라고 다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으로 인해 주변에 피해를 끼친다. 그런 이유로, '낙하산=나쁘다'라는 등식이 저절로 성립될 수밖에.
낙하산은 자신이 낙하산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도한 열정을 내뿜는다.
자신은 모르겠는가, 자신이 낙하산이라는 걸. 직급이 낮으면 낮은 대로 위에다 뭔가 증명하고 싶고, 직급이 높으면 높은 대로 위아래로 증명하고 싶어 질 테지.
우선 낮은 직급의 낙하산의 나쁜 사례. 안 해도 되는 야근을 하는 척하는데, 그걸 자꾸 윗선에 확인시키며 비슷한 직급의 일개미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 그것은 민폐가 된다.
그리고, 동료 일개미들이 기껏 쌓아온 성과들을 부정하고, 자신이 훨씬 더 잘할 수 있다고 설득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직속 상사의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하게 되면 일단 성공. 자신이 돋보이기 위해 주변을 깔아뭉갠다. 혹시라도 윗선에서 "열정 가득한 인재"라며 칭찬이라도 한다면 낭패다.
그런데, 이는 높은 직급의 낙하산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특징이다. 그런데 거기에다 높은 직급의 낙하산에게 일종의 결정권의 부스러기라도 손에 쥐어주면 그때는 전체 부서가 뒤흔들린다. 기존의 업무 시스템을 부정하고, 자신이 몸담았던 전 직장에서의 시스템을 들먹인다.
사실 제목만 거창하지, 직장 내 낙하산에 대처하는 방법이 있을까 싶다. 아예 납작 엎드려 조아리면 가능하겠지만, 자신이 직장 내에서 나름대로 쌓은 성취를 부정하고 들어오는 낙하산 앞에 납작 엎드리는 일이 말처럼 쉬울 리는 없다.
예전에 속했던 부서에서 10년 차쯤 되었을 때, 위에서 언급한 중에 후자에 속하는 낙하산이 팀에 떨어진 일이 있었다. 그가 그랬다. 기존의 업무 시스템 자체를 부정했고, 그에 대해 반발했지만 직급 차이 때문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입버릇처럼 "나는 네 발가락을 밟으려 온 사람이 아냐."라고 영어로 말하곤 했다.
나는 네이티브 스피커는 아니어도 해외 업무를 10년 이상 하면서 영어 때문에 업무를 그르친 적은 없었다. 하지만, "be on one's toes"는 사전을 아무리 뒤적거려도 저 맥락에서 올바르게 쓰인 용례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다만, '뉘앙스'로 미루어 짐작컨대 "나는 너를 괴롭히려고 온 사람이 아냐." 정도의 뜻으로 썼으려나.
지금은 이 또한 10년쯤 지난 일이라 크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읊조릴 수 있지만, 당시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마다 거의 매일 생각했다. 출근하는 길에 죽지 않을 만큼만 다쳐서 병원에 한동안 입원하면 좋겠다고. 그가 다치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다치길 바랐다니. 전문의와 상담을 하고 진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혹시 그런 생각이 우울증 내지는 공황장애로 빠질 수 있는 징조는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그까짓 거 때려치우면 그만이지! 틀린 말은 아니다. 때려치우는 게 능사도 아니고, 사람마다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 말처럼 이직이 불쑥불쑥 이루어지는 서프라이즈 이벤트는 아니지만,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그 끝을 기다리면 결국 해결된다.
직장 내 낙하산에 대처하는 방법은 결국 따로 없다. 슬프지만 그게 사실이고 현실이다.
아주 가끔은 괴롭고 힘들 때 영화가 위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럴 땐 속 시원한 복수극이 제격이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나 타란티노의 <킬 빌>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