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를 너무 많이 본 청소년 3
1988년을 떠올리면, ’88 서울올림픽 개막 일주일 후인 9월 24일, 당시 서울 사대문 안 메인 개봉관들에서 일제히 그해 ‘추석 특선 프로’를 내걸었던, 이른바 올림픽 특수와 추석 명절 특수가 어우러진 흥행 대전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에서는 엄종선 감독의 <변강쇠 3>, 맞은편 단성사에서는 당시로서는 거의 초면이었던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직배 영화 <다이 하드>, 을지로 4가 국도극장에서는 이두용 감독의 <뽕 2>, 종로 2가 허리우드 극장에서는 최민수, 신혜수 주연의 보기 드문 한국 뮤지컬 영화 <그녀와의 마지막 춤을>, 충무로 대한극장에서는 ‘미국 현지 올 로케이션’의 화려한 볼거리와 김지미, 신성일, 이보희, 길용우 등 황금 라인업까지 갖춘 <아메리카 아메리카>, 그리고 을지로 입구 중앙극장에서는 유진선 감독, 나영희, 김문희 주연의 <매춘>이 개봉했다.
이중 압도적인 흥행 성적을 거둔 <다이 하드>를 제외하고, 한국 영화 흥행 대결에서는 40만 명 넘는 관객이 관람한 <매춘>이 왕좌를 차지했다. 하긴, 생전 영화관에 가는 일을 즐기지 않으셨던 당시 30대의 내 어머니까지 친구분들과 <매춘>을 보러 가셨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연소자 관람 불가’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일은, 당시 중학생이었던 내겐 너무도 요원한 일이었고, 믿을 것은 오로지 비디오뿐.
요즘 재건축과 관련해 시끌벅적한 그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서 초중고 12년을 살았었다. 단지 내에는 4개의 상가가 있었는데, 단지 초입에 웅장한 규모를 뽐내던 ‘종합상가’를 비롯하여, ‘나 상가’, ‘다 상가’, ‘라 상가’가 각자 거리를 유지한 채 단지 내 적당한 위치에 자리 잡았었다. 상가마다 비디오 대여점은 한두 개씩 꼭 있었는데, 그중 영화에 깊은 관심이 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연소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보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중학생에게 열려 있는 문은 오직 한 군데, ‘나 상가 비디오 가게’였다 (안타깝게도 상호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그 사장님께 내가 영화에 관해 얼마나 커다란 관심과 사랑을 가졌는지, 그걸 어떻게 어필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사장님은 어린 내게 결코 말을 놓지 않으시고 꼬박꼬박 존대하시며 나의 취향을 존중해 주셨고, 극장에서 정식으로 개봉한 ‘연소자 관람 불가’ 영화의 비디오를 언제나 흔쾌히 대여해 주셨다.
흥행 대작 <매춘>의 비디오 출시는 당시 내겐 가장 큰 관심사였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집에는 나처럼 영화 <매춘>이 세상에서 제일 궁금한 친구들 몇몇이 모였고, 떨리는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96분 내내 숨죽여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을 대엿 명의 중학생들을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이후 30여 년이 흐를 동안, 이상하게도 영화 <매춘>을 떠올리면 김문희 배우가 방바닥에 초를 수십 개 켜놓고 자살하는 장면과 이어서 배신자의 결혼식을 찾는 검정 옷을 입은 여인들의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얼마 전,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통해 상당히 깨끗한 영상으로 복원된 영화 <매춘>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역시 1988년 당시 중앙극장에서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차지했던 작품인 만큼, 메시지는 강렬했고, 표현도 과감했다. 또한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나영희 배우의 카리스마가 새삼 놀라웠다.
※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2022년 7월 30일 발간한《아카이브 프리즘 #9 Summer 2022 "리와인드 - 비디오 시대의 어휘들》에 기고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