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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Aug 27. 2023

밤을 거니는 내 맘 알까

비디오를 너무 많이 본 청소년 8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왜곡될 수도 있고 흐릿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삶의 모든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디오와 관련된 나의 기억과 추억만큼은 기록을 넘어 내 기억저장소 어딘가에 소중히 저장되어 있다.


VHS, 즉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할 수 있는 비디오 플레이어를 처음 들였던 날 느꼈던 흥분과 감동이 어렴풋하나마 아직도 느껴진다. 비디오가 대중화되기 직전, 베타 플레이어가 잠깐 등장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어린 나로서는 베타와 VHS 포맷에 따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가격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비싸면 얼마나 비싼지, 당시 우리 집 경제 형편이 어떤지까지 개념이 닿았을 리는 없고, 그저 신문물이 집에 들어온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기계와 함께 역시나 낯선 무언가가 증정품으로 같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넓적한 윗면에는 큼직한 직사각형, 옆면에는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라벨에 적혀 있는 제목은 <야행 夜行>. ‘야행’? 당시 나는 새로 전학 온 짝꿍과 서로 아는 한자를 써서 알아맞히기를 즐겨하던 취미 아닌 취미를 가졌었지만, ‘야행’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까지는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가족들 누구도 영화에 크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었기에, <야행>이라는 1977년도 영화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지는 못했고, 일단 증정품으로 받은 것이니 어떤 내용인지나 보자며 온 가족이 둘러앉아 신문물인 비디오 플레이어에 비디오테이프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자동 재생이 되는 기종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가족 중에 영화 <야행>의 비디오테이프를 다시 재생시킨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고, 그때 나는 이 영화의 내용을 이해나 했는지 어쨌는지 관계없이, 꽤 여러 번 반복해서 봤다. 이후 그 비디오테이프의 행방조차 묘연해질 만큼 시간이 한참 흐른 후까지도, 내게는 1970년대 한국 영화의 대명사 격이었던 ‘윤정희, 신성일’ 두 배우의 젊은 모습을 내 기억저장소에 저장시켜 뒀었다.



30여 년이 흘러, KMDb VOD를 통해 영화 <야행>을 다시 보면서 나는 충격에 빠졌다. 물론 아주 어릴 때 증정용 비디오테이프로 봤었고, 당시 내용을 이해하면서 봤을 리는 없지만, <야행>은 내러티브가 단순하지 않으면서도, 윤정희, 신성일 두 배우의 매력이 선명하게 빛나고, 세련된 미장센으로 오감을 현혹하는 매력적인 영화였고, 심지어 이런 세련된 영화가 무려 45년 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70년대 중후반 당시 서울 시내의 풍경과 두 주인공의 근무처인 은행의 모습도 신기했다. 무엇보다 그사이 시대는 많이 변했지만, 일하는 여성과 결혼에 관한 현실과 고민을 보여주는 방식이 상당히 파격적이어서, 김수용 감독님의 다른 작품들도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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