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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Sep 18. 2024

의전(儀典)이나 프로토콜이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The Devil Wears Prada(2006)>의 후반부, 파리 패션 위크 중에 열린 행사장에서 편집장 미란다 곁에 껌딱지처럼 붙어 선 비서 앤디가 미란다를 향해 다가오는 초청 귀빈이 뭐 하는 양반인지 귀띔하는 장면이 나온다.


앤디의 역할은 미란다가 귀빈의 이름과 소속을 듣고 아는 체하며 인사를 나누도록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사전에 귀빈 명단을 죽도록 외워야만 했다. 앤디의 '의전 대상'은 초청 귀빈이 아니라 자신의 직속 상사 미란다인 셈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명시한 의전(儀典)의 뜻은 '행사를 치르는 일정한 법식, 또는 정하여진 방식에 따라 치르는 행사'이고, 옥스퍼드 한영사전에서 '의전'을 찾아보면 'protocol'이다.



별다른 의전이랄 게 필요하지 않았던 조대리의 사회초년생 시절, 당시 M사의 주력작이었던 외화 <어둠 속의 댄서 Dancer in the Dark(2000)>의 VIP 시사회가 있었다. 투자사, 배급사, 홍보마케팅 대행사 등 관계자들이 머리를 모아 이런저런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영화의 VIP 시사가 요즘은 안 하고 넘어가는 일이 눈에 띌 정도로 잦지만, 당시에는 꽤 드문 행사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요란뻑적지근한 행사에 유명인의 등장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그때도 예외는 아니어서, 각 회사에서 섭외할 수 있는 유명인들의 명단이 펼쳐졌고, 이런저런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섭외에 열을 올릴 때였다.


그러다 갑자기 조대리에게 깜짝 놀랄 미션이 하나 떨어졌다. 그것은 당시에 유명인 중에서도 유명한 분이었던 디자이너 앙드레 김 선생을 섭외하라는 것. 그저 예정된 날짜와 시간, 장소에 그분이 나타나면 되는 것이었고, 한 다리 건너라도 그분에게 먼저 말을 넣을 네트워크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대리가 확보한 것은 당시 앙드레김 의상실 대표번호가 다였다.


더욱 놀라웠던 건, 그분의 섭외가 생각보다 쉽고 빠르게 결정되었다는 것. 떨리는 손으로 대표번호를 누를 때, 주변에 동료 직원과 대표까지 숨죽여 조대리의 손끝을 응시했다고 기억할 정도로, 아무튼 관련된 모든 이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제발 그분이 섭외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달까.


전화를 받은 직원 분은 대략의 내용을 듣더니 직접 통화하라며 즉각 그분을 연결시켜 주었고, 손이 떨렸는지 목소리가 떨렸는지 조대리의 설명을 들은 그분은 흔쾌히 참석을 약속해 주셨다.


그리고 VIP 시사회 당일, 광화문 씨네큐브 1관 로비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그분을 기다렸고, 드디어 그분이 나타나셨다. 행사 진행 요원의 안내로 카메라 후레시가 요란하게 터지는 가운데, 누군가 조대리의 어깨를 살짝 밀었더랬다. "조대리가 직접 섭외했으니 얼른 가서 맞이해야지"라며.


제가 바로 전화드렸던 조대리라며 어릴 적 TV에서나 뵀던 그분께 인사를 드리던 순간을 떠올리면, 대놓고 그날 조대리가 행한 일이 '의전'이었다고 말하기는 쑥스러우나, 또 아니라고 할만한 근거도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조대리는 VIP 귀빈들이 참석하는 종류를 불문한 행사나 파티, 국내외 영화제에 감독과 배우가 참석하는 일정 동안 그분들의 손과 발이 되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의전'에 참여할 일들이 꽤 있었고, 그게 의전이었든 프로토콜이었든 프로토콜에 따른 의전이었든 간에, 성별과 직급과 나이를 불문하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전의 대상자들이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일개미들이 발로 뛰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열심히 발로 뛰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일개미는 당황하거나 흥분하면 안 된다. 눈앞에 유명인이 왔다 갔다 한다며 흥분했다가는 될 일도 그르치고, 안 될 일은 더 망치니까.


VVVIP가 정확히 몇 시에 도착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그분이 도착하기 전까지 남의 영업장 엘리베이터를 아예 잡아두지 못할 상황이 닥쳐, 하염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감내해야겠지. 애초에 누가 행사장 엘리베이터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을 하자고 영화사에 기를 쓰고 들어가겠나.


"나는 이런 일 하려고 이 회사 들어온 게 아니"라는 생각도 집에다 두고 나와야 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편집장 비서직에 지원한 앤디가 편집장 이름도 모르자, 수석 비서이자 앤디의 선배인 에밀리가 말한다. "지금 이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수백만 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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