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자신의 고민을 친구에게 털어놓고 싶을 때, "이건 내 얘기가 아니라 어디서 들은 얘긴데"라고 운을 뗀다. 그것은 빤히 보이는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듣는 사람은 알고도 속아주는 척 어디 한번 털어놔보라고 한다.
"이건 너만 알고 있어야 돼"라고 시작되는 이야기도 비슷한 맥락이다. 보통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는 이전에 들은 사람이 아마 103명은 넘을 것이다.
이건 조대리가 어디서 들은 얘기인데(그렇다 치고), 이런 상사가 지구상 어딘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구체적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자신도 모르면서, 담당자가 애써 작성한 보고서가 어디가 맘에 들지 않는지 구체적으로 자신도 수정 방향을 제시할 수도 없으면서, 일단 화부터 낸다. 그리고 애써 '컬러 출력'으로 뽑아간 여남은 장의 A4 용지를 묶은 클립을 빼 던지고는 담당자의 얼굴 앞에 종이를 패대기친다.
그런 일을 당신이 겪었다면, 무슨 생각이 먼저 들겠는가? 환경 문제에 대해 늘 고민하던 사람이라면, 일단 나무에게 미안함을 느낄까? 당장 그 상사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패대기치고 싶어 질까? 내가 여기 아니면 어딘들 이직하지 못할까 싶은 마음에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며 버럭 소리를 지를까?
사무실 바닥에 흩뿌려진 종이를 주섬주섬 집어 들고, 다시 수정해서 보여드리겠다고 말하겠지. 아마 직장인 만 명 중 만 명은 다 이렇게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라, 만약 저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퇴근 시간 20분 전이었다고 치자. "내일 아침 9시(출근시간)에 맞춰서 수정본 내놔!"라고 한다면?
당장 20분 후인 퇴근 시간 이후 예정했던 소중한 저녁 시간, 자기와의 약속이건 뭐건 간에 예정된 일정이 있다고 곧바로 응수할 수 있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그 상사의 집무실 바깥에서 고래고래 질러대는 고함 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의 표정 관리는 또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그보다 대체 뭘 어떻게 수정해야 이 분의 마음에 쏙 들까? 이런저런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나지 않을까?
보고서 수정 건은 여차저차 수습되어 지나갔다고 치자. 어느 날, 감사실에서 전화를 받는다. 감사실에서 무슨 일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중, 세상 번듯하게 생긴 감사실 소속 담당자가 당신 눈앞에 A4 종이뭉치를 내던지는 그 상사에 관해, 이전에 듣거나 알지도 못했던 혐의에 대해 묻는다면?
저는 그런 일은 듣지도 보지도 당하지도 않았습니다!라고 감사실을 박차고 나올 것인가? 아니면, 그간 속 안에 쌓여있던 울분을 빌미 삼아, 정강이를 걷어 차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행위를 목격한 적은 있다며 에둘러 진술을 보탤 것인가?
나 하나만 번듯하고, 나 하나만 정직하고 솔직하고 투명하고 맑고 깨끗하게 업무를 진행해서 만사가 형통하다면, 수십 수백 명이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회사라는 공간에 갈등이 생길 일이 뭐가 있겠는가.
없던 일을 지어내 거짓말을 하는 것은 결코 권장할 수 없지만, 어떤 경우에는 솔직함보다는 침묵이 미덕일 수도 있다. 굳이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미화시킬 가치도 없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알아도 모른다고 거짓을 말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굳이 진실을 파헤치는 데 일조하겠다고 나서봐야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오지랖'으로 귀결될 수도 있고, 의도와 다르게 불손한 내부고발자라는 굴레가 덧씌워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위의 경우가 닥친다면 어느 쪽이 정답일까?
영화 <라이어 라이어 Liar Liar(1997)>에서 능숙한 거짓말로 매번 승소하는 변호사 짐 캐리가 어느 날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겪는 고초를 보며, 마냥 쌤통이라고 비웃을 것인가? 혹시라도 거짓말에 능한 그의 능력을 부러워한다면, 그것은 돌을 맞아야 할 만큼 비도덕적인 생각인가?
허진호 감독의 신작 <보통의 가족 A Normal Family(2023)>에서 각자 자식이 저지른 잘못을 두고, 당장 경찰서로 달려가 자수시키고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자꾸만 입장을 바꾸고, 벌어진 일을 없던 일인 양 취급하려 드는 영화 속 부모의 입장에 대해 마냥 비난의 화살만 쏘아댈 수 있는가? 만약 그런 일이 당신에게 닥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