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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Oct 23. 2024

별일 없지? 언제 밥 한 번 먹자

회사에서 마주칠 때마다 "별일 없지?"라고 묻는 동료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아래 보기 중에 '정답'은 뭘까?


① 그럼, 별일 없지. 넌 어때?

② 어제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서 왼쪽 발목이 삐끗했고, 지난 주말엔 피싱 메일에 속아서 128만 원이 결제되는 바람에 금융감독원에 민원 넣고, 카드 정지시키고, 방금 전 부장 보고에서는 된통 깨져서 기분이 아주 울적하고 죽을 맛이다. 그러는 넌? 별일 없어?



정답이랄 게 뭐 있겠냐만은, ①번으로 대답하면 질문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무난하게 응대함으로써, 이어지는 대화를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②번의 대답이 마냥 정답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질문자가 듣고 싶었던 대답은 어쩌면 저 세 가지 불상사 중에 가장 마지막 것이었을 수도 있으니,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쏟아낸 격이다. 게다가 질문자는 이미 왼쪽 발목 삐끗을 듣는 순간부터, 딴생각에 빠졌을 수도 있다. 머릿속으로 노래 한 곡을 재생시키거나.



아마도 '별일 없냐'라고 물은 사람이 저렇게 물은 의도는 이 정도로 유추해 볼 수 있다.


회사 안에서 진짜 '특별한 일'을 겪지는 않았는지 궁금해서 슬쩍 떠봤거나, 아니면 그냥 살면서 누군가 마주쳤을 때 말을 걸지 않고 지나치면 몸살이 날까 봐 형식적으로 묻는 입버릇일 수도.


한창 회사 분위기가 뒤숭숭할 무렵(아니다, 회사란 곳은 뒤숭숭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지키려는 듯이 1년 365일 늘 뒤숭숭하다, 다만 그 정도가 시기마다 다를 뿐), 조대리와 눈만 마주치면 몸을 쓱 가까이 가져다 대며 "요즘 별일 없냐"라고 묻던 동료가 잊을만하면 한 명씩 나타났다.


위의 예시처럼 ②번 스타일의 대답을 원하는 것이 너무도 투명하게 보여서, 조대리는 그럴 때마다 늘 ①번 스타일로 대답했다. 우스운 건, 그럴 때마다 질문자의 눈망울에 0.1g 정도 느낌의 실망감이 스쳤다. 그러면 조대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걸려들지 않았다며.




또 다른 경우.

회사에서 마주친 역시 동료(다른 사람이다)가 눈만 마주치면 매번 "언제 밥 한 번 먹자"라고 한다면? 그런데, 매번, 하루에 세 번 마주치면 세 번 모두, 저 말을 한다면?


① 그래, 언제 한 번 시간 맞춰보자.

② 그래, 말난 김에 내일 점심은 어때?


과연 질문자가 진심으로 같이 밥을 먹자고 한 말인지, 조대리가 저 말의 진정한 의미를 간파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이른바 '입에 발린 소리'는 태생적으로 취향에 맞지 않았던 터라, 진짜로 시간을 맞춰서 함께 밥을 먹을 요량이 아니면, 조대리는 '언제 한 번 밥 먹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지키지 않을 약속은 아예 입밖에 꺼내지도 않겠다는 생활신조 때문에, 조대리는 늘 ②번 스타일로 대답했다.


"이번 주 목요일 시간 괜찮은데."


그게 무슨 요일이든 성사될 리가 있었겠는가?


저런 대답을 들은 질문자는 금세 눈썹이 팔자가 되어 난감함을 드러냈고, 조대리는 일부러 눈치 없는 척,


"그럼 금요일?"


이렇게 일부러라도 물고 늘어지는 '놀이'를 즐길 참이었다.


하지만, 저런 식의 대화에는 ①번 식의 대답이 정답이고, ①번 예시의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친구는 회사 밖에서 찾자고 설파한 적이 있지만, 사실 회사에서 속을 터놓을 친구가 적어도 한 명은 필요하기는 하다. 다만 그 관계의 영속성이 같은 회사에서 근무한 이후에도 이어지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별일 없냐'라고 슬쩍 떠보거나, 같이 먹지도 않을 밥을 '언제 한 번 같이 먹자'라고 빈말을 남발하지는 말자. 그러느니 그냥 눈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게 가느다란 관계를 이어가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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