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자가 담당했던 업무를 후임자에게 넘기는 일련의 작업을 뜻하는 '인수인계(引受引繼)'.
몸값을 올리며 이직을 하건, 이런저런 이유로 타 부서로 전배를 하건, 일신상의 이유로 퇴사를 하건 간에 누구나 인수인계의 과정을 무시하고 그 조직을 떠나는 일은 거의 없다.
조대리에게도 몇 번의 인수인계의 기억이 있다.
첫 직장에 입사했을 때엔, 전임자 역할의 선배가 퇴사는 했으되 업무 특성상 프로젝트 계약으로 회사에 비정기적으로 출근을 했기에, 업무를 물려받는 일 자체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러다 7개월 근무 후, 생애 첫 '영화사'로 이직하게 되었을 때엔 또 그때대로, 후임자에게 업무 인계가 그렇게 기억에 강하게 남을 정도로 복잡한 과정은 아니었다.
두 번째 직장이자 첫 영화사에서 2년 남짓 근무 후 퇴사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조대리의 퇴사 통보(아닌 통보)에 불 같이 화를 내며 못 들은 걸로 하겠다던 대표는 조대리와의 대화가 끝난 직후, 조대리와 같은 직급의 동료 대리에게 당장 후임자를 알아보라 지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대리의 후임자가 입사했다.
조대리는 퇴사를 준비하면서, 2년여의 시간 중에 극장에서 개봉한 외화 마케팅 업무에 대한 자료를 서류 상자에 정성스럽게 라벨링까지 붙여가며 정리했다. 물론, 지나고 생각해 보면 그렇게 정리한 자료가 뭐 그리 대단했을까 싶었지만, 당시 조대리로서는 떠나기로 결심은 했지만 자신의 생애 첫 영화사에 대한 애착과 애정과 애증을 모조리 갈아 넣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정리했다.
조대리는 첫 영화사를 퇴사한 이후, 동년배의 동료를 비롯해 그 회사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과 한동안 자주 만나며 근황을 나눴다. 그러던 어느 날, 때때로 모이던 술자리 멤버 중 하나였던 A가 조대리의 후임이 퇴사하면서, 그 후임이 되어, 조대리의 후임의 후임이 되었다. 조대리로서는 이미 자료를 남김없이 다 정리하고 퇴사한 터라, 후임의 후임이 된 A에게 별다르게 언급할 사항은 없었다. 그러다, 그 A가 '농담처럼' 건넨 한 마디가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조대리님이 남긴) 자료들이 하도 중구난방이어서 그걸 정리하는 데에만 한참이 걸렸다" 라며, 면전에 대고, 그것도 웃는 얼굴로, '디스'를 한 것이었다.
퍼뜩 떠오른 생각은 '괘씸하다'였다. 조대리로서는 2년의 시간을, 영화별로 분류하여, A부터 Z까지 담당했던 업무의 모든 것을 차곡차곡 담아둔 서류 상자만 몇 개였는데, '감히' 그런 조대리의 노력을 '중구난방'이라 표현한 A에 대한 마음의 문이 닫혀버렸다. 그리고 그때 이후, 그 문이 다시 열릴 기회는 없었다.
그런 일을 겪고 난 후, 조대리는 몇 번의 인수인계를 경험했다. 패기찬 각오와 함께 참여했던 '제1회' ㅇㅇ어린이국제영화제가 첫 번째 영화제 폐막 직후 파국을 겪어, 졸지에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을 때에도, 조대리는 자신이 맡았던 업무 관련 자료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남겼고, 경기도 모처 어느 벌판인가에 있었던 물류창고로 이런저런 서류, 컴퓨터, 자료들을 옮겨야 하는 순간에도, 분노가 치솟았지만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는 것이 그나마 한 가지 남는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
그러다 C사에 입사하게 된 조대리는 오히려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회사에서 적응해 가기 시작할 무렵, '제2회' ㅇㅇ어린이국제영화제를 준비한다고 들은 Z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조대리가 담당했던 업무와 관련한 질문이었고, 그 순간 조대리는 '올 것이 왔다'는 느낌과 함께, Z에게 세상에서 가장 쌀쌀맞은 말투로 '내가 그것을 지금 댁에게 알려줄 이유는 없다'라고 일갈하며, 물류창고에 보관시킨 자료에 모든 것이 다 있으니, 이럴 시간에 그 자료를 검토하라고 쏘아붙였다.
통화가 끝난 후, 일면 통쾌하기는 했지만, 문의해 온 내용에 조목조목 디테일을 알려주는 것이 고수(高手)의 덕목이 아니었을까 잠깐 후회가 들기는 했다.
그렇게 시간이 또 흘러, 한국영화 해외배급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던 10년 치 업무를 누군가에게 인계해야 하는 시간을 맞이한 조대리는, 지나간 과거 속에서 하수(下手)와 다름 아니게 처신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고수의 태도를 견지하며 성실하게 자료를 정리했다.
하지만, 고수가 되는 길은 몹시도 멀고 험난했다. 이번에는 조대리의 업무를 인수받은 X가 조대리가 10년 동안 이렇게 저렇게 회사 일을 자기 것인 양 기울였던 노력을 180도 뒤집어엎어버렸다는 제보가 속속 접수되었다.
예를 들어, 빨간색이던 벽을 10년 동안 파란색으로 바꿔놨더니, X가 파란색을 지워버리고 노란색으로 덧칠한 격이었는데, 그렇게 하수를 못 벗어나고 파르르 떨던 조대리는 다시 하수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귀에 들어오는 제보 하나하나에 촉각을 세우고, 자신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10년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려는 X를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그땐 미처 몰랐다. 하다못해 어느 지자체 장이 바뀌어도, 전임자가 기껏 만든 마스코트도 없애는 게 다반사인데, 하물며 회사의 일개 담당자가 바뀌었다고 벽 색깔 하나 바꾸는 게 대수겠는가.
당장은 누군가로부터 업무를 인수받을 일도, 누군가에게 업무를 인계할 일이 없어지자, 이제야 고고한 재야의 고수라도 된 양, 조대리는 뒤늦게나마 하수로서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본다.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을 해탈한 도사처럼 의연하게 대처하기란 쉽지는 않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후회와 깨달음의 연속인가 보다.
'깨달음'에 관한 영화를 생각해 보니, 자신이 ㅇㅇ임을 깨달은 브루스 윌리스의 절규가 심금을 울렸던 <식스 센스 The Sixth Sense(1999)>와 조대리의 첫 영화사에서 수입, 배급했던 <디 아더스 The Others(2001)>, 카이저 소제의 정체를 알게 된 후 머그컵을 떨어뜨려 박살 냈던 채즈 팔민터리의 망연자실에 전적으로 공감했던 <유주얼 서스펙트 The Usual Suspects(1995)>가 떠오른다.
대개 뒤통수를 치는 반전(反轉) 영화를 보며, 우리의 삶 속에서도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지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