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리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영화라면 장르를 불문하고 가리지 않는다. 그건 영화 보는 일을 취미로 할 때는 물론, 영화 관련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 물론, 개인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는 있겠지만, 적어도 영화 일을 하면서 월급을 받는다면, 자신이 소속된 회사에서 투자한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잠시 넣어두는 게 좋다.
한국영화 해외 배급일을 하던 과거 언젠가, 당시 인턴이었던 남자 학생 한 명과 웃지 못할 일이 하나 생겼었다. 2~3분 남짓한 어느 한국 공포영화의 예고편 대사를 따서 한글 문서로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된 그 학생은 건장한 체격과 어울리지 않게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조대리에게 고민을 상담했다.
자신은 공포 영화가 너무 무서워 보지 못하기 때문에, 비디오룸에 혼자 들어가 앉아 그 공포 영화의 예고편의 영상을 보며 대사와 자막을 따는 일을 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조대리는 생각했다. 피도 눈물도 없이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며 그 학생을 비디오룸으로 밀어 넣는 일이 온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까짓 2~3분 분량의 공포 영화 예고편 자막 따는 일은 눈 감고도 할... 수는 없지만, 두 눈 부릅뜨고 한 컷도 놓치지 않고 보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과감하게 그 학생의 업무를 면제해(?) 주었다.
혼령이 등장하는 심령 공포물, 온갖 흉기를 동원하는 슬래셔 공포물, 뒤통수를 서늘하게 만드는 심리 공포물 등등 다양한 종류의 공포 영화를 별로 무서워하지 않고 보는 조대리만의 방법이라면 방법이 하나 있다.
1991년 2월 북미에서 개봉한 후, 1992년 3월 30일, 64회 아카데미 주요 5개 부문을 휩쓴 <양들의 침묵 The Silence of the Lambs(1991)>을 너무 좋아한 조대리는 아카데미 수상 기념으로 AFKN 채널에서 특별 방영했던 당시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한 후, 아침에 학교 가기 전 밥을 먹으면서 그 영화를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외울 듯이 보던 때가 있었다.
오죽하면 조대리의 어머니가 그렇게 사람 해치는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조대리가 걱정되어, 담임선생과의 면담 시간에 하소연을 하시기까지 했을까.
그런 종류의 영화를 보는 조대리만의 노하우라면 노하우가 무엇이었냐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 영화 속 장면을 상상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극악무도한 살인마가 몹쓸 짓을 하는 장면이더라도, 조대리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이는 영화 속 장면에 포함되지 않은 촬영장을 떠올리는 것이다.
'저 장면은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라,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 칼은 가짜 칼이고, 저 살인마도 돈 받고 연기하는 배우이고, 죽임을 당하는 피해자도 돈 받고 연기하는 배우이므로 실제로 죽는 것이 아니"라고 되뇌다 보면, 공포 영화 속 무서운 장면이 별로 무섭지 않게 된다.
그렇게까지 상상의 나래까지 동원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설마 영화 <스크림 Scream> 시리즈의 고스트페이스가 실제 살인마이고,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Final Destination> 시리즈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사건사고가 실제라고 믿는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조대리의 예전 동료 중 한 명은 회사에서 투자한 공포 영화 시사회가 끝난 후, 영화 상영 내내 귀에 이어폰을 꽂고 영화와 전혀 관계없는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신경을 분산시켰다고 실토한 적이 있었다.
만약, 영화 일의 어느 부분이건 간에, 실무 담당자가 영화의 장르를 선택해서 담당할 수 있다면, 때려죽여도 공포 영화는 피하고 싶은 사람도 분명 있을 수 있다. 화면 속 끔찍한 장면을 도저히 제정신으로 볼 수 없다면, 그 영화의 홍보이건 마케팅이건 국내 배급이건 해외 배급이건 간에, 해당 영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고객에게, 바이어에게 제대로 알릴 수 있을까 싶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영화는 아니지만, 조대리가 '세상에 없던 테마파크'를 만들겠다며 요란을 떨던 조직에 속해있을 때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조대리는 타고난 고소공포증 소유자로, 롯데월드의 실내형 롤러코스터인 프렌치 레볼루션을 타러 갔다가, 몇 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단 1초도 눈을 뜨지 못했다.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롤러코스터를 비롯한 각종 어트랙션의 기획 업무에 참여하게 되었고, 롤러코스터를 마냥 무섭다고 타지 못한다면 그 어찌 '고객 경험'을 기획할 수 있겠냐는 깨달음을 얻고, 이 업무로 월급을 받는다면 최소한의 '돈 값'은 해야 한다는 나름의 비장한 사명감에 사로잡혀 꽤 다양한 종류의 롤러코스터에 몸을 내맡긴 적이 있었다.
롤러코스터가 무서운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저걸 타고 있다가 나사라도 하나 풀려버리면 사고가 나서 혹시라도 저세상행 특급열차로 환승하는 게 아닐까, 그런 종류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잠시 생각을 고쳐먹으니, 전에는 무서워서 생각만 해도 진땀을 흘렸던 롤러코스터를 나름대로 '즐겁게' 타고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공포 영화를 대하는 실무 담당자의 마인드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것이 비단 특정 장르의 영화와 관련한 영화 일을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뭐든 닥치면 다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각자의 입장과 상황과 사정에 따라, 하기 싫은 일, 무서워서 못하겠는 일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조대리는 '세상에 없던 테마파크'에 대한 계획이 연기처럼 사라진 지금, 롤러코스터를 여전히 즐기면서 탈 수 있을까? 정말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럴 리 만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