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리가 한창 '조 과장'으로 나름의 맹위를 떨치던 때였다. 조대리보다 10여 년 정도 어리던가 했던 후배 하나가 회사를 옮겼다고 연락이 왔다. 물론 조대리에게만 연락한 건 아니었다. 그 후배는 보험회사로 이직을 했었거든.
뭣 때문에 만날 약속을 잡고 했겠는가. 보험 가입 상담 때문이었다. 조대리는 마음속 모든 좋은 마음을 그러모아, 그 후배의 계약 한 건 성과를 올려주고 싶기도 했다. 1차 미팅에서 이런저런 조건을 말했다. 심지어 구체적인 액수까지는 아니었지만, 얼마 전까지 같은 직장에 있었기에 대략의 연봉 수준까지 포함해서. 그 이유는 달마다 내야 하는 보험료의 수준을 역제안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후, 그 후배를 다시 만나 2차 미팅을 가졌고, 1차 미팅에서 쏟아낸 이런저런 조건을 감안했다며 두어 개의 보험 상품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그 후배가 제안한 보험상품은 조대리가 구체적으로 말했던 월 납입 보험료의 수준이 적어도 두 배 이상 비싼 것들뿐이었다.
아, 이러면 곤란한데 싶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딱 잘라 거절하기보다는 에둘러 두루뭉술하게 하지 않는 쪽이 낫겠다 싶었으나, 어쨌든 일부러 시간을 내서 만난 터라 일단 설명이나 들어보자 싶었다.
그런데, 한창 설명을 듣던 중, 그 후배의 말 한마디가 양쪽 귀를 잡아 뜯는 듯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면 기분이 나쁘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 조대리님이 60세가 되면 아무것도 안 하실 테니까, 그 말인즉슨 수입이 전혀 없으실 거잖아요"
여보세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60세가 되면 아무것도 안 할 거라고요? 그러면 대체 이 비싼 보험 상품은 제게 왜 들고 오신 건가요?
마음 같아선 그 자리를 뒤집어엎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시간이 좀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은 확실히 기억한다. 다만, 그냥 듣고 넘기기에는 몹시 불쾌해서, 그런 식으로 권유하면 세상 누가 '네, 그렇죠. 제가 60살이 되면 아무것도 안 하겠죠, 네네.'라고 하겠냐며, 그쪽 회사에서는 상담 교육을 그런 식으로 하냐며, 결국 속엣말을 내뱉어버렸고, 그날 이후 그 후배와의 인연은 끝났다.
조대리는 아직 60세가 되려면 멀었(다고 생각하)지만, 회사원 혹은 직장인, 그것도 CJ라는 버젓한 대기업에서 십수 년을 근무하는 동안, 한 번도 은퇴라던가 노후 계획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심지어 그 시간 동안 그 회사의 구성원으로 지내면서, 매달 꼬박꼬박 통장에 입금되는 월급, 어쩌다가 받게 되는 인센티브가 영원히(그랬다, 그때는 그게 마치 '영원'일 수도 있겠다고 믿었다) 이어질 것처럼 스스로 단정 짓고 안일하게 살았다.
빨강-파랑-노랑 우산 아래 안락함이 조대리의 40대 이후의 삶을 보장해 주는 보험과 다름없다고 믿었다. 주변에 정년퇴직을 채우고 경건하게 회사를 떠나는 선배를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지만, 그게 자신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하긴, 따박따박 바로 내일부터 펼쳐지는 새로운 하루 동안에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몇 년 뒤를 미리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만은, 내일 이후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흥청망청 지내온 시간들은 새삼 후회스럽다.
얼마 전, 한동안 같은 부서에 속했으나 실질적으로 업무상 조대리의 직속이라기엔 다소 애매한 구석이 있었던 후배 한 명이 아주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카톡 메시지가 아닌 전화를 걸어와, 당장엔 놀란 마음으로 받았더랬다.
얼마만의 대화인지 따져볼 새도 없이, 아주 오랜만이고, 그 후배는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자녀까지 출산했고 출산 휴가와 육아휴직까지 마치고 복귀한 지도 꽤 된 듯 한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바로 어제 만났던 사람들처럼 어색 열매를 따먹는 시간은 최소화하고, 신나게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그 후배가 과거 같은 부서일 때, 조대리가 자신에게 했던 '조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그때의 상황과 조대리가 자신에게 건넨 말의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후배와 달리, 조대리는 단 0.1그램도 기억나지 않는 내용이라 적잖이 당황했다.
아니, 조대리가 감히 꺼낸 조언의 내용보다, 조대리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조언'을 했다는 것 자체에 충격을 받았다. 누가 누구한테 조언을 해? 중국어 능통자인 후배에게, 중국어도 중국어지만,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라는 내용이었다는데, 조대리는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를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지금 누군가 조대리에게 그게 어떤 내용이든 '조언'을 던진다면, 조대리는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조언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당시 어떤 친구가 조대리에게 언급했던 자기 계발서 한 권을 산 적이 있다. 그 책의 제목은 가물거리지만, 내용 중 이런 것이 있었다. 대체적으로 회사원들은 자신의 직업을 '회사원' 내지는 '직장인'으로 단정하지만, 그것은 틀린 것이라고. 회사를 다니며 월급을 받는 일은 결코 직업이 될 수 없다며, 자신이 잘하는 특기라던가 기술의 내용이 직업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그 책의 내용이 전혀 와닿지 않았다. 여전히 출장 때 작성하는 입출국 관련 신청서의 직업란에는 당당하게 '회사원'이라고 기재했으니.
지금, 누군가 조대리에게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영화 일 관련한 회사에 다녔으나 지금은 회사에 다니고 있지는 않지만, 뭔가 영화와 관련한 일을 하려고 준비 중인 왕년의 조대리?
브런치 공모전에서 또 탈락한 후, 한동안 외면하고 있던 브런치에 오랜만에 접속해, 갑자기 떠오르는 대로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글을 쓰다 보니, 2025년이 밝은 지가 어느덧 석 달이나 지났고, 3월 하고도 5일째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그리고, 문득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익살대마왕 짐 캐리의 우울한 눈물이 가슴속을 후벼 팠던 영화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