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삶을 연장하겠단 의지가 됐을까. / <외롭지 않은 말> 권혁웅
<외롭지 않은 말> 시인의 일상어사전, 권혁웅 지음
말에는 ‘멋’이 있다. 각 말 자체가 갖고 있는 다양한 뜻, 말과 말의 조합해 만들어내는 새 뜻, 말을 해체해 발견하는 숨은 뜻까지. 말에는 멋이 있다. 그래서 말은 외롭지 않다.
권혁웅 시인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맞벌이한 부모님 덕에 ‘외로울 권리’를 깨치고 닥치는 대로 텍스트를 읽었다고 전했다. 또한 오랫동안 ‘교회 오빠’로 살면서 성경을 공부하다 신화에 빠지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이야기와 언어를 탐닉한 덕일까. 그는 시인이 되어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서문에서 책 <외롭지 않은 말>을 일상어들의 속내를 다룬 것이라고 썼다. 문학에서는 ‘죽은 말’ 취급을 받는 ‘일상어’야말로 삶의 현재형이자 표현형이지 않을까, 상투어와 신조어, 유행어, 은어들의 무의식에 삶의 원형이 있는 것 아닐까, 반문했다.
그래서 권 시인은 일상어사전을 펴내면서 ‘말멋이 무엇인지’에 대해 보여줬다. 그가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조합해낸 일상어들은 정말 전부 ‘지금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다. 교회 오빠, 또 콸라 된 겨?, 밀당, 사랑하니까 헤어지자, 안알랴줌, 언제 밥 한 번 먹자 등.
특히 우리가 애매한 상황을 모면할 때 늘 하는 거짓말, ‘언제 밥 한 번 먹자’에 대한 통찰은 감탄할 만하다. ‘거짓말’로 낙인 찍혀버린 문장을 삶을 연장하겠다는 의지로 풀어내는 시각은 이 사전에 대한 애정을 더하는 은근한 마음의 이끌림이 된다.
그는 단어와 어구들을 설명하면서 겉뜻, 속뜻, 그리고 친절한 해석이 달린 주석과 요즘 쓰임새를 알려주는 용례까지 달아두었다. 때로는 애틋하고, 때로는 산뜻하며, 때로는 날카롭다가 은밀한 언어를 슬며시 들이밀기도 한다. 피식 웃음이 나는 지금의 아재개그와도 같은 시인의 유머도 존재한다. 지난 3월에 책을 발간한 그가 지금 단어를 추가한다면 아재개그에 대한 주석도 달았을 텐데.
새로운 사전을 한 장씩 펼쳐보면서 기억하고 싶은 새로운 정의들을 옮겨 적었다. 말멋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선물의 참고 자료가 되길 바라며 시인의 일상어 정의 두 가지를 옮겨봤다. 가장 가까운 사랑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는 일상어, “가져가지 마시오”와 삶을 이어가겠단 의지를 발견할 수 있는 일상어, “언제 밥 한 번 먹자”다.
일상의 말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고무하기 때문에 책제목을 <외롭지 않은 말>로 지었다는 시인의 말처럼, 그가 발견한 말멋 덕에 우리는 외롭지 않다.
by 브라이스
pp.17-19
가져가지 마시오
겉뜻 : 절도를 경고함
속뜻 : 사랑을 설명함
목욕탕 수건 문구의 진화사는 재미있다. 처음에는 '00목욕탕'이라고 쓰더니 곧 '가져가지 마시오'로 바뀌었다. 그래도 집어 가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최근에는 '훔친 수건'이라는 문구를 새긴 곳도 많아졌다. 마지막 문구는 어떻게 보면 독한 유머이지만 다르게 보면 손님 제일주의이기도 하다. '가져가면 도둑놈'이라는 주장이지만 목욕탕 주인이 갖고 있어도 '훔친 수건'이기는 매한가지니까. 처음에는 목욕탕 주인의 소유권을 주장하다가, 다음에는 손님에게 간청하다가, 끝내는 손님의 입장에 서버린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수건에 적힌 문구가 일러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이건 내 마음이야'에서 '내 마음을 가져가지 마'로, 다시 '뺏어온 마음'으로 소유자가 변하고 있다는 것. 수건은 한 사람이 제 몸에 가장 가깝게 대는 물건이다. 수건과 피부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랑의 마음도 그럴 것이다. 사랑은 그 사람과 가장 가깝게 붙어 있으려고 한다. 아무리 얇더라도 사랑은 가림막을 견디지 못한다.
(중략) 흔히 이렇게 말한다. 그리움에 관해서라면 여자들은 여러 개의 작은 방을 두고 있지만 남자들은 단 하나의 큰 방을 두고 있다고. 여자들이 지나온 사람에 대한 추억을 각각의 방에 저장해둔다면 남자들은 다 망각해버린다고. 나는 그것을 목욕탕 수건에 빗대어 말하겠다. 제 몸에 가장 가까이 했던 것에 대해서라면, 그것이 마음이든 물건이든, 여자들은 모두 챙겨 가고 남자들은 죄다 버리고 간다고.
pp.183-185
언제 밥 한 번 먹자
겉뜻 : 다음에 길게 만나거나 아예 만나지 말자는 제안
속뜻 : 삶을 연장하겠다는 의지
주석
친구나 지인을 만나서 가장 자주 하는 인사가 이 말일 것이다. 비슷한 말로 “언제 술 한 잔 하자” 등이 있으나 활용 빈도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음주를 매일 하지는 않으며, (설혹 매일 한다고 해도) 하루 세 번씩 하지는 않는다.
밥 먹자는 제안을 이토록 자주 하는 것은 그것이 생명을 유지할 만큼 중요해서(우리는 ‘먹고사니즘’을 얘기하지 ‘살고먹기즘’을 얘기하지 않는다)만이 아니다. 밥 먹는 일은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다. 식구(食口)란 ‘밥 먹는 입’이라는 뜻이다. 이정록 시인이 <식구>라는 시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릇 기(器)라는 한자를 들여다보면 / 개고기 삶아 그릇에 담아놓고 / 한껏 뜯어 먹는 행복한 식구들이 있다 / (…) / 그중 큰 입 둘 사라지자 울 곡(哭)이다.” 1연이다. 개고기 뜯어 먹는 입들의 탐욕에 대한 얘기다. 시인은 3연에서 이 글자의 뜻을 이렇게 바꾼다. “기(器)란 글자엔 개 한 마리 가운데에 두고 / 방싯방싯 우는 행복한 가족이 있다 (…) 일터로 나간 어른 대신 / 남은 아이들 지키느라 컹컹 짖는 개가 있다 / 집은 제가 지킬게요 저도 밥그릇 받는 식구잖아요.” 이번에는 개를 포함해서 한 식구다. 이렇게 보면 같이 밥 먹자는 말은 식구처럼 친밀해지자는 따스한 제안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게 별로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제안이라는 데 있다. 한 대기업 사보에서 자사 직원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조사 대상의 70퍼센트가 가장 자주 하는 거짓말로 이 말을 들었다고 한다. 만화 <마음의 소리>에서 작가 조석은 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여주고는 이 장면의 속뜻을 이렇게 푼다. “우리가 언제 목성에 갈 수 있을까?”(언제 밥 한 번 먹자고 먼저 말을 건넨 사람) “이건 왼손이야.” (그러자고 손을 들어 응답한 사람) 거기에 아무 진심도 담겨 있지 않다는 얘기다.
그런데 실현 가능성이 적다고 해서 그 말을 나누는 진심마저 부정할 수 있을까? 저 말을 나눌 때 우리는 정말로 밥 한 번 먹자고 제안하는 것 아닌가? 다만 “언제”를 특별히 지칭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언제” 먹나? 답은 이렇다. 언젠가는. 단, 지금은 아니고. ‘지금’을 강조해서 읽으면 이 말은 ‘너랑은 안 먹어’라는 뜻이지만 ‘언젠가’를 강조해서 읽으면 이 말은 ‘너랑 밥 먹을 때까지 우리 관계는 끝난 게 아니야’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실행을 자꾸 연기함으로써 우리의 삶(곧 너와 한 식구가 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친밀한 삶)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다. 당신이라면 어떤 쪽에 내기를 걸겠는가?
용례
결혼식 주례사에 꼭 들어가는 말이 있다.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얼핏 들으면 신성한 계약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저주의 말 같다. 어차피 같이 살아봐야 죽을 땐 따로따로야. 하지만 이 말의 진정한 뜻은 (살아서 동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음마저도 둘의 결합을 막을 수 없다는 거다. 저 말에서 죽음은 하나의 문턱에 불과하다. 자기야, 먼저 가 있어. 금방 따라갈게.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언제 밥 한 번 먹자”의 “언제”와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의 “죽음”은 특정하지 않은 시기로 영원을 담보하는 용어라는 점에서 쌍둥이인 셈이다.
<외롭지 않은 말>에서 빌려온 문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