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구김살을 부유함으로

<오징어게임>

by 물 결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면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의 폭이 달라진다고들 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이 현실을 꽤 이른 시기부터 파악하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는 1년 정도 익숙해졌다 하면 기어이 부모님을 따라 이삿짐을 옮기고 마는 게 일상이었다. 한 번도 내 방이 있는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다른 또래 여자아이들은 방 안에 바비인형이며 액세서리와 책들을 가지런하게 꽂아놓으며 본인의 취향과 정서를 길러갔지만 나는 유년시절 대부분을 엄마와 좁은 방 한 개에 몸을 욱여넣고 모든 일거수일투족과 일상을 엄마의 타박과 간섭과 분리되지 못한 채 보냈다. 나는 방을 꾸미는 기억도 없을뿐더러 내 취향이 형성될 수 있는 기회와 안락함이라는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자랐다.

친구네 집 엄마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셨다. 나는 정성 어린 식사를 대접해 주시는 친구와 친구어머님 앞에서도 겨울이면 손이 터서 설거지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던 엄마를 겹쳐봤다. 평생 만져볼 일이 없었던 최신형 태블릿 PC를 보여주는 친구를 봤을 때도 엄마가 쓰던 10년이 넘은 도시바컴퓨터가 겹쳐 보였다. 기숙사에 있는 공용 컴퓨터로 인강을 듣던 나의 심정은 친구의 신형 태블릿을 보는 순간 체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갖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한 물건들에 대한 선호가 처음부터 없는 사람인 것처럼 억누르고 살아서인지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위축 때문이었는지 그런 빛나는 새것들에게는 눈길조차 주려하지 않았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겠거니 하고. 하지만 내가 당연하게 가질 자격이 없다며 포기해 온 가치들을 그렇게 멀지 않은 인간관계를 통해, 그들에게 당연하게 주어지는 환경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목격할 수 밖에 없게된다. 그런 순간마다 같은 하늘 아래를 마주 보고 살고 있지만 각자 경험하는 세상의 폭이 다르다는 좌절감과 그 벽을 깨고 싶다는 오기를 동시에 갖게 했다.

돈을 가진이 들은 구김살이 없다고들 한다. 어떤 실패를 한들 받쳐줄 안전망이 있으니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주도력과 기개를 갖고 자랄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가난한 집에서 자란 이들은 과자 한 봉지, 학용품 하나를 사더라도 수십 번을 고민한다. 조금이라도 싼 것을 찾으려 질보다는 가격을 먼저 눈에 담을 수밖에 없기에, 도전은 고사하고 그 용도에 맞는 수준에도 한참 뒤떨어지는, 어쩔 수 없는 선택만을 하게 된다. 부유한 아이들은 어떻게 하면 용도에 상회하는 양질의 물건을 살 수 있을지를 따지는 시간에 동시에 가난한 아이들은 그 상황을 모면할 정도의, 어쩌면 그 용도를 간신히 실행할지도 미지수인 그 정도의 작은 만족감의 틀을 형성하고 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취향은 고사하고 자격지심만 덕지덕지 붙어 까끌까끌하고 조급한 성미를 지닌 채 성인이 된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감정은 오기 아니면 체념이다. 포기하고 살 것인가 아니면 죽도록 노력해서 내 삶을 바꿀 것인가.


죽도록 노력해서 내 삶을 바꾸면 가진이들의 부유함을 우리도 쟁취할 수 있을까? 이 한 문장에서 시작된 작품이 있다. <오징어 게임>이다.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사회에서 빚에 떠밀려 죽음으로만 삶이 끝나도 다행인 정도의 형편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게임을 통과하면 456억이 주어진다는 의문의 명함하나를 받고 홀린 듯 경연장으로 자발적으로 향한다. 이것은 다단계나 비상장 코인에서 소수의 자본가들이 본인의 자본 축적을 확대하기 위한 잔혹한 계획에 자의로 걸어 들어오는 대다수의 개미들을 불러 모으는 사회상과도 같다. 오징어 게임은 더 도를 넘어 자본축적이 목적이 아닌, 살육게임을 전 세계 재벌들이 순전히 재미만을 위해 관람하게 해주는 용도로 무고한 참가자들을 잔인하게 도륙한다. 작품에서는 가진이들의 유흥이 목적이라는 내용으로 형상화되었지만 결국 실제 현실에서 자본가들이 없는 이들을 현혹하여 본인들의 배를 불리고 본인들이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약육강식의 고리 안에 일반인들을 편입시키려고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짚어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일확천금을 획득하기 위해 게임에 참여한 이들은 죽임을 당함으로써 남은 게임생존자의 상금이자 목숨값으로 곧바로 치환된다. 자본가들의 눈에 투자자들은 개인으로써가 아닌 돈으로써 가치가 매겨지는 장기짝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 현실도 <오징어 게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로지 생활비를 벌려는 목적이라는 생존을 하기 위한 방도가 코인이나 다단계와 같은 고위험 상품에 대한 투자밖에 남지 않은 이들도 생각보다 많다. 주식과 코인 등 어느 정도 리스크가 자명한 자산에 투자하는 이들 중에서는 여느 다른 이들처럼 노동자본으로서 합당한 임금을 받을 수 없는 이들이 뛰어드는 유일한 생존 창구로써 기능하는 케이스들도 실제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노동자가 아닌 디지털 투자자라는 주체를 띌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숱한 가진 자들이 만든 현혹성 프레임에 기반한 것이고 더불어 노동자본만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빈곤이 디지털사회의 흐름 안에서 소수가 아닌 개인의 대다수로 갈수록 이 오염이 확대되고 있다. 문제는 오징어게임 참가 명함을 건네는 이들의 유혹의 손길을 기댈 곳 없는 이들이 과연 뿌리칠 수 있냐는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가난한 이의 빈곤은 더욱 심화되면서 쉽게 일확천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위험도가 높은 상품들이 성행하고 있다. 충분한 공부와 정보를 갖춰 개인이 분별력을 키울 재간이 없는 이들은 자산가들이 작정하고 개인 투자자들을 속이려 드는 것에 방어적으로 대처할 수 조차 없이 그저 게임장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문명과 인터넷 기술의 성장으로 누구나 다양한 방식을 찾고 길러 성공신화를 이룩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세상 곳곳에 흩어진 천문학적인 가짓수의 정보들을 찾아보고 공부하면 돈을 얼마든지 벌 수 있다. 누구에게나 '열린 기회'가 주어졌다는 시대의 흐름은 분명 희소식이다. 게 중에는 기반 자본이 없이도 재능과 끈기 하나로만 승부를 보더라도 수익을 기대할 만한 일자리도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허락되었기에 경쟁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누구에게나 그 배움으로의 접근이 가능해졌기에 그들과 대비되는 특색 있는 우위를 점하기도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더 위층의 사다리로 발을 옮기기 위해 흙수저 들은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 무거운 한 발을 위로 옮겨내기 위해, 그 사다리에 오르기 전 기초체력으로 몸을 다져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 위층을 사다리가 아닌 에스컬레이터만으로 단 몇 초 만에 오를 수 있는 여건인 이들을 보며 억울해할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백방으로 뛰면서 얻어야 하는 정보와 공부라는 기회도 돈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드는 끈기와 노력마저도 돈으로 치환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아니 근데 이게 맞는 건지. 어떻게 끈기와 노력마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갈수록 돈은 모든 것의 전제를 넘어 진리가 되어가는 듯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