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힙합 단상
*유튜브 <머니그라피> 그루비룸 편
재입학 후, 학과특성상 여러 곳에서 발표를 해야 할 일이 많아지다 보니 원래도 고민이 있었던 주제다만 말을 잘하는 게 뭘까에 대해 부쩍 생각한다. 평론가나 방송인처럼 말을 업으로 하는 사람 제외하고 스물한 살이던 내게 적지 않게 충격을 준 사람들이 있었는데 힙합 프로듀서 그루비룸의 인터뷰 영상이었다. 당시에 즐겨 듣던 오왼-CITY를 작곡한 사람들이 누구야? 에서 시작해 힙합프로듀서는 작곡 말고 또 뭘 하는 사람들일까 해서 찾은 인터뷰였다. 정말 특이하도록 성격적 기질과 어투가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모두 말을 기함할 정도로 잘했다. 당시 그들의 음악적 커리어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하던 상태였는데도 이 정도 아우라의 언변이면 안 봐도 성공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인터뷰 영상은 유튜브에서 삭제되어 아쉽다)
언어의 유려함은 다방면의 분야에서의 기반지식을 얼마나 폭넓게 알고 있느냐에 좌우된다는 것에는 의심이 없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그전에 선행되어야 할 단계는 본인이 몸담은 분야에 얼마만큼의 열정이 있는지를 보여주고 본인의 아웃풋에 긍지를 갖는 것이다. 현업으로 있는, 또는 진행하고자 하는 분야를 사랑하는 마음을 동력 삼아 그 분야의 전문가가 먼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결과물을 토대로 더 나은 위치로 올라서서 더 양질의 환경에서 그 분야를 파고들어 갈 수 있다. 고뇌와 노력으로 응축된 시간들이 지나 어느 정도의 고비를 넘긴 사람들의 말에서 오는 무게감은 한마디를 들어도 다르다. 나는 나름대로 애정을 갖고 키워보고 있던 게 글쓰기였는데 나와 비슷한 나이인 20대 초중반에 그들이 쌓아 올린 무수한 커리어와 일화들이며, 몇 분 남짓한 인터뷰에도 직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서 나오는 자신감과 무게가 대단해 보이고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무작정 글을 올리는 SNS 계정을 열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계기도 이때였다.
두 사람은 스물넷의 나이에 야생과 같던 격변의 힙합시장에서 천재적인 커리어로 정상의 자리에 오른 프로듀서 팀이다. 이때 힙합광이었던 기억을 떠올리자면 한창 쇼미로 인해 2015~6년 멜론차트에서 약진을 펼치게 되고 단기간의 유행으로 끝날 것 같던 힙합은 연이은 쇼미 후속 시리즈들의 흥행과 힙합스타들의 공연문화로 이견 없는 가요차트의 주류를 차지하게 됐다. 뉴미디어 붐을 타고 래퍼들과 프로듀서들의 일상과 작업기를 예능으로 풀어내는 <딩고프리스타일> 채널의 대흥행으로 미디어와 담을 쌓겠다고 완고한 으름장을 냈던 레이블들과 아티스트들은 딩고의 힘에 탑승해 대중성을 잡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됐다. 힙합이 어느 정도 주류 대중문화로 올라오게 되며 방송국과 유튜브채널은 힙합 프로그램을 쏟아냈고 여러 형태의 콘텐츠에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도전하고 고전하는 것이 반복되던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다. 짧은 시간 안에 결과물로 입증하고 그에 기반한 자신감과 소신을 산업 내 모든 이들에 피력해야 하는 환경이었다지만 날 선 기민함과 열정이 말마다 묻어나는 게 더 높은 이상에 대한 목마름이 이미 성과를 쌓은 후의 인터뷰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작업과정의 일대기를 설명하고 직업에서 얻고 있는 즐거움과 가치, 대중에게 주고자 하는 것, 본인의 작업방향이 어떻게 전환되고 있는지, 평범한 대중이었던 내가 보기에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앞으로의 비전과 작업계획을 막힘없이 정리하는 모습이 마치 말로 그림을 그리는 듯했다. 최근 몇 년은 관심분야를 신장시켜야겠다는 이때 느낀 결심과는 거리가 먼 일에 잠겨있었다. 재능도 겸비한 이들이 작정하고 뭔가를 하면 말도 안 되는 커리어를 쌓는구나 하고는 그저 다른 종족인 천재들 이야기이겠거니 하고 포기했다는 말이 더 맞겠지만. 그러다 어제 우연히 알고리즘에 그들이 진행자와 음악적인 담론을 나누는 인터뷰를 보게 됐다. 그 분야에서 성공을 한 것이 목표도달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분야들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며 본업의 역량에 필요한 새로운 수단을 얻고 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제는 20대의 열망과 영민함으로 서있던 날에 여유와 연륜이 어우러져 이제는 한 회사의 사장님이 되어있었다.
이제는 한 분야에 국한돼 있는 성질로만 음악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 그 경계의 개념이 무감해지는 시대가 됐다. 그들은 오리지널리티의 문제, AI의 예술영역 침범과 급변하는 기술, 대중들이 문화를 향유하는 방식의 변화 등의 복합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고뇌하는 지속성에 대한 고민은 모든 직업인의 고민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올라운더 음악을 하겠다는 의미의 시그니처 사운드 groovy everywhere를 만들었다. 이들의 고민은 여전히 다양한 음악을 하되, 장르가 허물어져 이것들이 희석된 결과물에 익숙해지는 대중들에 작업물 별로 어떻게 단일한 장르로서의 오리지널리티를 어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으로 변모했다. 그들도 2024년이 이렇게 변하리라고는 알지 못했겠지만 한 가지 만의 정통을 세련된 방식으로 대중에게 보여주는 게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 everywhere라는 개념을 다시 어떻게 정의할지에 대해 생각해 볼 법하다.
쇼미와 뉴미디어 시대를 거치며 격동기를 지나온 힙합은, 코로나로 인한 물리적인 제약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 그 침체기에서 부흥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중론에 최근 더콰이엇의 인터뷰가 화제가 됐다. 현재의 흐름 상 세상은 어느 분야의 새로운 스타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현답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대중은 아직 신선한 모습을 보여줄 게임체인저를 원할지라도 급변하는 기술과 매체가 문화를 다루는 방식이 그의 탄생을 저지하고 있다는 말로 이해했다. 이미 힙합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그 신선함을 구현할 수 있는 가닥이 거의 남지 않았다. 결국 자신의 개성대로 썼다는 결과물들은 유행의 최전선에 있는 것들의 연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대중들도 이를 모르진 않지만 우리들이 워낙 전형적인 것에 익숙해진 탓이다. 무엇보다 현시대 자체가 본질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어버렸다. 뭐든 빠르게 휘발되고 진득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 휘발을 애석해하지만 누군가는 이 빠른 속도를 즐기기도 한다. 하나의 본질보다는 다양성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는 양태는 나로서는 굉장히 슬프다. 세상과 기득권은 스페셜리스트보다는 과할 정도로 제너럴리스트를 원한다. 한 가지의 분야에 대해서도 알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두세 개가 넘는 분야를 다 섭렵해야 이상적이라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완벽한 제네럴리스트라 하면 그 분야에서 다 깊은 이해를 동반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내가 못 따라는 것인지 아니면 얕게라도 아는 척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도 단일한 개념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깊이를 쫒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알맹이 없는 세계가 될 것이다.
타 장르와 힙합의 구분이 사라져 og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 것처럼 세계시장에서 k pop도 k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지가 모호해졌다. 위기론까지는 기우라 해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 것은 사실이다. 팝의 작곡가들로부터 곡을 받고 가사의 절반 이상이 영어로 채워져 빌보드 차트에 오르는 유행가가 된다. k의 짙은 캐릭터성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던 k pop이 pop의 종주국에서부터 완벽한 인정을 받기 시작한 어느 기점부터 그 성공의 원인에서 k를 지우려 고 안간힘이다. bts가 주목받기 시작한 그 시점을 기억해 보면, 화려한 칼군무와 다채로운 MV 스토리라인은 지금 kpop의 특징과 같지만 솔직하고 자전적인 한글 가사 또한 차별화된 매력으로 다가갈 수 있던 주요 성공요인이었다. 앞으로 하이브가 무슨 계획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대가 되지 않는 건 왜인지.
더콰이엇은 장르가 주는 긍정적인 에너지와 본질에 대해 다시 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힙합이라는 장르를 좋아했던 이유를 돌아보면 과장되지 않은 삶을 가사로 옮겼을 때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그 투박함을 기반으로 한 솔직함이었다. 그의 말대로 오리지널리티로 가는 길은 이미 한참 전에 벗어난 후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고 대중과 현세대의 아티스트들은 그 변화에 맞춰 들어가게 된 지 오래다. 그 오리지널리티의 시대에 살았던 세대는 그 아랫세대와 정통성에 대한 사랑에 대해 설파하고 같이 고민할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해줄 말이 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한 분야에 깊은 성찰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다면 그래도 명맥은 소수에게라도 이어지지 않을까. 그 업계의 기라성 같은 이들이 업계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한 심도 깊은 담론들을 들으니 나도 어떤 분야를 더 사랑하고 싶어졌다. 나도 내 주력 분야에 주목할만한 결과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정이라도 계속 꺼지지 않고 이어지면 좋겠다. 다소 성급한 마무리지만 하나의 다짐을 쌓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