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봉준호 감독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본인은 한 번도 ‘프로파간다’를 의도하고 지향하고 영화를 제작한 적이 없다고. 대중에게 그런 식으로 좋은 해석으로 먹혀 들어 간다면 좋은 것이고 꼭 영화라는 매체가 사회비판적인 요소를 담을 필요는 절대 없다며. 예전부터 영화가 주는 사회적인 영향력을 신봉하고 사랑하던 사람이었던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영화는 철저하게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태동되는 보기 좋은 오락거리, 겨우 그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저예산으로 시작할 수밖에는 방법이 없는 독립영화 감독은 본인이 사회를 바라보는 가치관과 틀을 투영하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는 전면적인 태도로 임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미 본인 아래에 딸린 식구들이 많고 하나의 산업화된 환경 안에서 엄청난 작품으로서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굴지의 영화감독들은 철저히 상업성의 측면에서 본인의 작품을 바라봐야 하는 현실도 물론 이해한다. 하물며 처연한 계급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한 <기생충>을 만든 창작자부터 사회비판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언급한 것을 미루어보았을 때, 그리고 철저히 산업구조 하에서 수익을 목적으로 탄생한 매체라는 것을 볼 때, 영화라는 매체 자체는 사회문제를 환기하고 해결과정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감독이 만드는 작품의 콘텍스트 자체는 대중들의 공감대 혹은 현실적인 부분에 대한 담론을 건드리는 시늉을 하기 위해 프로파간다적인 요소들을 집약했지만 사실은 콘텐츠 산업은 어떻게든 투자자와 기업들로부터 자본을 이끌어낸 만큼의 수익을 대중들에게 소구하여 그 본전을 회수하기 위한 전략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에 대중이 할 말이 없기도 하고.
대중들로 하여금 가장 수월하게 이목을 끌어낼 수 있는 주제는 부익부빈익빈이나 범죄 소탕등의 피상적인 묘사 수준에서의 사회문제이며 그것에 쉽게 이끌리는 대중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예전에는 정서적인 부분을 고려하여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실상을 표현하는 데 그쳤다면 현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특히 하층민들의 삶을 더욱 디테일하고 사실적인 소재들로 실제적인 아픔을 직접적으로 건드는 묘사도 서슴지 않는다. 기생충에도 거듭해 등장하는 상층구조와 하층구조로 지배와 피지배 계층으로의 구분을 서슴지 않는 연출들이 그렇다.
대중들의 관심을 한 톨이라고 더 끌어보고자 사회문제를 반영하는 것을 넘어 필요 이상으로 과한 자극에만 초점을 맞춘 장면들이 포함이 되어 있는데 애초에 사회의 모순을 짚어내고 순수하게 건강한 저항담론이 형성되는 목적으로 만들었다면 굳이 이러한 자극적인 묘사들은 필요가 없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역겨울 정도로 과한 리얼리즘이 건강한 담론을 생산한다는 인과관계는 없기 때문이다. 기득권의 악행은 스크린의 장면을 통해 더욱 잔혹하게 표현되고 하층민들의 삶은 더욱 궁핍하고 실제 하루하루 그 생활 전선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 작품을 차마 접하지도 못할 정도로 저자세를 종용한다. 요즘 영화 드라마 콘텐츠들의 이러한 특징 자체가 이러한 작품들을 만든 기획자의 의도가 건강한 저항담론에 있는 것이 아닌 자본주의라는 화려한 가치를 쥔 기득권의 이데올로기에 종속되는 것을 택하고자 본 작품을 만들었다고 보여질 정도다.
하지만 달리 보면 대중매체가 현실 사회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정도로도 큰 공헌일 수도 있다. 딱 여기까지만 생각하다는 것이다. 해결책을 제시하는 순간 대중매체는 오락성과 상업성이라는 측면을 아예 건조하게 배제한 정책과 법과 같은 존재와 다를 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해결책을 제시까지 한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콘텐츠 창작자가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것도 하나의 의견인지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중들에게는 저마다의 주관으로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대중매체에서 창작자가 곳곳에 심어놓은 은유나 상징들을 배치해 놓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어떤 작품들이든 누군가에게 새로운 저항담론에 대한 토론의 장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작품을 완성시키는 주체는 결국 그 작품에 대한 해석과 담론을 이루는 청중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