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쓴 초콜릿

아 좋은 사람인지 어떻게 아는데

by 물 결

초콜릿을 입에 털어 넣기도 전에 침이 고인다. 머릿속이 달콤한 생각들로 차오른다. 그래, 아는 맛이 무섭다. 혀에 닿으면 얼마나 달지 이미 예상할 수 있다. 뻔하게 아는 맛이기도 하다. 그냥 모두가 포장지 위의 로고만 보아도 뻔히 예상가는 그런 맛. 페레로로쉐(*특히 좋아한다)는 견과류가 씹히는 풍미가 재밌고 가나는 어릴 적부터 익숙한 밀크 초콜릿 자체다. 이러나저러나 우리가 초콜릿에 기대하는 건 여전히 달콤함이다. 짠 걸 생각했으면 감자칩을 고르지 않았을까? 그런데 요즘 들어 달콤함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졌다. 가끔은 미각을 잃은 사람이 되고 싶다.


연애경험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다고 말할 수 있는 어정쩡한 나이에 이르렀다. 그런데 연애 다운 연애는 못해보긴 했다. 어째 썸이라 하는 게 더 맞는 짧은 기간이었던 케이스는 그나마 다행이지. 그래도 인간관계는 나름 많이 넓혀왔다. 새로운 사람이든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이든 사람을 통해서 많이 배운다. 어릴 때는 남의 좋은 점을 상기하고 따르려고 했다.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고 어릴 적 추억을 들으면 내 마음도 덩달아서 녹아들어 가는 게 좋았다. 그런데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성숙한 사람들이 많아질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타산지석의 예를 더 많이 마주치게 된다. 나 또한 그렇다. 나이를 먹을수록 성숙하는 게 아니라 경험만 많아진 사람이 된다. 그냥 상처받고 이리저리 치인 경험만 많아지니 경계심이 생기고 날카로워졌다. 사람을 믿고 싶디가 아차 싶다. 아 그때도 이런 순간이었는데! 하면서 감정의 발을 훅 뺀다. 마음은 이제 녹는 건 고사하고 웬만한 낙엽에도 견줄 만하게 버석거린다.

누굴 알아가든 이제는 마음의 반만 내어주는 습관이 생겼다는 노래 가사가 진정 다가온다. 초콜릿과 인간의 공통점은 나이를 먹고 제조기한이 훌쩍 넘어간 채 세상에 놓이면 이 가공 덩어리도 상한 부분이 한두 개씩 생긴다는 것이다. 찾아보니 초콜릿은 플라보노이드라는 성분이 지방의 산화를 막아준다고 한다. 나름 유통기한이 튼튼하리만치 길다고 하는데 그래도 언젠가 그 튼튼한 결심도 산화되는 날이 올 거다. 누구나 좋은 사람으로 남고싶다는 그런 결심이 있다. 살다보면 세상에 피로가 들고 정신 챙기기도 바빠서 웃는 것에도 인색해지는 날도 기어이 오고 만다. 그런데 겉만 봐서는 모른다. 이 초콜릿이 진작에 상한 건지 부식이 막 시작되고 있는지. 어쨌든 세상에 나와 출시가 되긴 했으니 포장지는 두르고 있다. 다들 그냥 겉보기에는 멀쩡히 단내 나는 사람인 것처럼.


나 스스로 어디가 부식되고 썩었는지는 알긴 하는데 이 썩는다는 게 내 자의로 시작되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어떻게 이걸 자각했다고 해도 복구하기가 꽤 쉽지 않다. 그래도 우린 살아있는 생물이니까 더 번지지 않게 할 수는 있으니 다행이다. 그래도 자력으로 멈추는 건 가능하니까. 사실 스스로가 어딘가는 온전치 못한 구석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도 귀하다. 내가 남한테 상처를 주는 순간이나 쫌생이 같아지는 순간들은 없던 일처럼 축소시키기를 좋아하니. 이래서 자기 객관화가 중요한데 이게 쉽지 않다. 독하게 쓴소리를 해주는 지인이 곁에 있으면 몰라도.

사귄 지 어느 정도 됐을 때(*장거리였다) 힘든 일로 불면증이 생겨 요즘 자기 전 넷플릭스에서 <먼 훗날 우리>의 ost를 들어야만 잠들 수 있는 시기가 있었다. 불면증이 생겼다고 말하니 방 잡고 넷플릭스 보면서 니 몸이나 만지고 싶다고 하는 그런 말을 들었던 순간은 떠올리고 싶지 않을 궂은 기억으로 남았다.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감정을 갖기로 결심한 게 얼마나 무용했는지. 사람을 좋아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그렇게 중대한 순간의 가치가 왜 이렇게 웃기고 가벼운지. 언젠가 진지했을 나의 마음이 웃긴 게 되어버려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건 어린 내 마음에게 하는 작별과도 같았다. 이제 타인에게 좋아한다는 마음을 갖는 것 자체가 어떤 이들의 마음에는 이미 무용한 가치로 여겨지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도구같이 자리 잡게 됐다면서.

그런데 갑을관계는 모두가 알다시피 모든 인간관계에 다 있다. 갑을이 조금밖에 없는 관계라면 축복받은 거다. 느끼고 있든 무의식적으로든 정도의 차이지 모든 관계와 순간마다 필히 존재한다. 그걸 알고도 잘 조절하면서 배려해 가면서 사는 거다. '상대가 날 더 좋아하는구나' 이 말은 어떤 이들에게든 참 번뜩이는 무언가다. '더 배려해야지, 참 고마운 일이야'가 되면 참 좋은데 그러면 이 세상에 가슴 아픈 일은 70% 이상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됐을 거다. 내가 갑인 것을 알게 돼도 갑질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게 어떻게 보면 궁극적인 사람됨의 기준이 됐다. 갑을의 존재가 전제될 수밖에 없는 세상이기에 사람들이 사람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을이 내가 됐을 때는 인생에서 평생 뼈가 저릴만큼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에피소드 하나씩을 장만할 수 있게 된다. 아, 다시는 안 겪고싶다.


전에 못 본 새로운 초콜릿 상표가 눈에 띄면 먹기 전에는 그런 생각이 든다. 아 이거 블루베리 향이 강하면 어떡하지? 카카오 함량이 많아서 쓴맛이 나면 어떡해? 따위의 쓸데없는 걱정들. 입에 들어가지 않고도 쓴맛과 혹시 모를 특이한 맛을 걱정하는 것은 지우기로 했다. 그래도 일단 단 구석이 있으니까. 그래도 아직까지는 누구든 처음 만날 때는 설레고 재밌다는 마음이 살아있다. 아직은 세상에 타인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는, 그런 눈부신 기대로 서린 얼룩들을 매번 닦아보려 한다.


노력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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