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쳐폰 속 풍경

어느덧 13년 전!

by 물 결

이 사진은 중학교 2학년 때 가족들과 함께 새만금에 놀러 가 새해 첫 일출을 맞았던 때의 순간을 담은 것이다. 그때는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스마트폰처럼 화질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닌 일반 피쳐폰, 그러니까 2g 폰에서 터치 기능만 추가됐다고 말할 수 있는 조그마한 터치폰을 가지고 찍었던 사진치곤 제법 그럴싸하게 나온 것 같아 꽤 흡족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이 사진을 찍으면서 새해 소망이랍시고 생각했던 것들은 그렇게 거창하지 않았었다.


당시엔 그렇게 제법 끝내주는 사진이 나오는 피쳐폰을 버리고 소위말해 폼나는 스마트폰도 생겼으면 좋겠고, 내가 좋아했던 아이돌가수가 다시 합쳤으면 좋겠고, 나와 취미가 같은 남자친구를 만들어 달라는 소원도 빌었었다. 지금 내가 이런 것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중학교 때 썼던 다이어리에 해가 뜨는 그림과 함께 쓰여있는 새해 첫날의 일기를 최근에 우연히 다시 펼쳐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느 날부터 지금 이 순간 까지도 그날 빌었던 소원들처럼 진솔하고, 그만큼 순수하고도 담백했던 ’어떤 것’이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 특히 2학년때는 어떤 사소한 것에 감정기복이 매우 심했었다. 노래를 좋아하게 된 게 그즈음인데, 유독 어느 노래 한곡을 들으면 하루종일 그 감정에 심취하며 그 노래와 내가 겪는 생활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연관시켜서 이입해서 듣다 보면 그에 탄력을 받아 글도 써보기도 하곤 했다. 이런 습관이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기도 쓰게 된 거고. 참 그때는 감정기복이 심하다 보니 어떤 크고 작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괜히 큰 의미를 두는 것을 좋아했다. 친구와 화해하면 유독 관계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는다거나 내가 노래를 할 때마다 그때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게 지금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 수 있었고, 그에 따라 느껴지는 행복감이 너무 좋았다.

지금은 오글거린다며 웃어넘길 생각들이지만 중학교 2학년때니 할 수 있었던 소박한 생각들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이후 감정이 메말라져 있다거나 예전의 , 어렸던 나와 지금의 내가 조금은 달려져 있다는 왠지 모를 슬픈 괴리감이 들 때면 어김없이 중학교를 다닐 때의 자신을 되뇌고 싶어질 때가 있고, 그럴 때마다 이 다이어리를 꺼내본다. 지금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느껴지는 건 문체뿐만이 아니라, 어릴 때라 그런지 지금이라면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당시의 풍경과 겪었던 작은 상황들 까지도 매번의 소소한 감정들로 엮어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니 사뭇 아득한 곳으로부터의 나를 새로 마주하는 듯했다. 어린 나의 흔적들을 읽어보니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이렇게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추억과 소소한 감정들과 만날 수 있다니 새삼스럽지만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요즘 이맘때의 내가 겪었던 소중한 순간들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많다. 돌이켜보면 수없는 크고 작은 날들이 나를 스쳐왔지만 막상 지금 이 순간 그때의 상황과 감정들을 완벽히 느끼기에는 흐릿한 것이 잘 잡히지가 않는다. 날짜조차도 떠오르지 않으니 한편으로는 참 애석하기도 하다. 항상 다 지나고 나서야 기록을 남겨놓지 않은 것을 탓하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는 다시 마주하기 어려울 것이다.


글로 적어 기록을 남긴다는 행위는 묘하다. 신체와 기억력은 본인들의 흔적을 세상에 흩뿌리는 느낌이라면 글을 쓴다는 것은 본인의 흔적을 세상에 치덕치덕 펴 발라놓는 느낌이다. 생애마다 남겨놓았던 얼룩이 바래지고 가끔은 세월의 풍파에 지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의 나와는 다른 모르던 나의 모습을 다시 마주하기 위해 공책 앞에 펜을 들어 글씨라는 그림을 써 내려간다. 어떠한 감상을 기록할 때는 반드시 후에 이 글을 볼 누군가를 염두하고 쓰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굳이 그때의 일을 거창하게 남긴다거나 하지 않는다. 단순히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억하고 싶기 때문에 썼던 사소한 기록들도 퇴색된 지금의 나를 양껏 씻어 내린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더 좋았던 것 같다. 한 곡의 음악을 들으면서 주변의 친구들과의 일화를 떠올리며 추억하기도 하면서 작은 감정들까지도 고스란히 마음에 담아둘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충분했다. 지금은 가사 하나하나를 새기며 이렇게 음악을 들어본 지가 오래되었다. 20대 후반이라는 나이를 넘보는 지금의 나에게는 여유의 문제도 문제지만 좋은 일이건 슬픈 일이건 감정이 무뎌져 도저히 마음에 따끔거리는 자극조차 오지 못한다. 빠른 속도로 우리 곁을 스쳐가는 시간은 이런 변함에 애석해 할 찰나도 허락히지 않는다.


얼마 전 중학교 때는 줄곧 들었었던 노래가 생각나 인터넷을 켰더니 나와 같이 각자 그 시대에 얽힌 개인들의 추억을 떠올리며 가사를 되뇌며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밑에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오글거리는 가사를 좋아하는 거냐는 댓글이 보이며 소위말해 다들 ‘중2병’에 걸린 것 같다는 댓글이 보였다. 여러 의견을 주고받는 이들을 보다 보니, 매일같이 각박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붙잡고 있는 지금의 삭막한 스스로가 오버랩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맞춰진 틀이나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또한 이런 틀이 존재한다는 것은 과연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일까.


어른이 되면 감성과 낭만을 느끼는 것에 회의적이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상처와 피로에 젖어 들어 감성을 느끼는 장치가 고장 났을 뿐이다. 사회를 탓하기에는 바로잡아야 할 것이 투성이니 남들도 같이 그 무채색에 잠식되고 바래지길 원한다. 그 각박함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사소하고 작은 감정들을 느끼는 것을 ‘구식’이라며 치부한다. 이런 사소한 감정들을 어느샌가 무시하게 되고 그런 작은 감정들엔 의연해져야 한다는 것이 과연 성숙한 ‘어른’의 의식으로 도달하는 길이라 말하는 것인지. 오글거린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아주 가끔은 이런 ‘작은 감정‘들을 되뇌는 것이 힘이 될 때가 있다. 이의 소중함을 잃어버릴 정도로, 또는 웬만한 감정들에는 의연해질정도로는 각박해지지는 말자고. 어릴 적 일기가 계기가 되어 또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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